소유냐 존재냐
대학 다닐 때 에릭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읽지를 못했습니다.
이번 학기 철학수업에서 '사물과의 관계'를 다루게 되어, '소유냐 존재냐'를 읽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참 큰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사회학자로서 무언가를 분석만 한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인간의 전 영역; 몸과 혼과 영혼의 모든 영역에서 잘 사는 것에 대한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철학이 주는 유익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여기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다'는 말은 우리의 생각에 전제로 작용합니다.
전제는 생각의 중립상태가 아닙니다. 전제 안에는 이미 아이디어가 들어 있습니다.
경제학의 전제는 '인간은 합리적 선택을 한다'라는 아이디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많은 부분 합리적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에릭프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라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사상적 총체임을 알려줍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이며 문화적인 것입니다.
문화적이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체계의 결과물이라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이익'이라는 단어의 뜻을 제시합니다.
"인생의 목표는 개개인의 소망충족이라고 보는 학성은 고대의 아리스티포스 이래 17, 18세기의 철인들에 이르러 다시 제기되어 명백히 표방되었다. "이익"이라는 말이 "영혼을 위한 이득"이라는 의미(성서의 경우가 그렇고, 스피노자까지만 해도 그런 의미였다)이기를 멈추고 그 대신 물질적, 재정적 이윤을 뜻하게 된 그 시기에, 그것은 쉽게 고개를 들 수 있었던 관념이었다."
효율이니, 이익이니 하는 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시대까지만 해도 언제나 영혼의 유익을 포함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이 말은 단지 물질적 유익만을 뜻하는 것으로 점점 변질되더니 이제는 마치 영혼이 없는 것처럼 대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 저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사진 같은데 제가 어린 아들을 업고 있고 아들은 제 등에 업혀 있는 사진입니다. 우연히 이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한참을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등에 업힌 아들의 표정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날 집에 들어가 자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어떻게 놀았고, 어떤 나쁜 짓을 해서 엄마에게 혼난 그런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아이들과 누워 시간을 보내며 인간으로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는 진정으로 행복과 무관합니다.
물론 필요는 충족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필요를 넘어서는 부는 조금 유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 말에 바로 반박을 하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의 사랑만을 바라지만, 크면서 재정적인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돈이 없는데 아이들한테 어떻게 행복한 삶을 주느냐"
저도 이러한 상황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도 아이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주지 못할 때 아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메시지로 인해 발생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준다면 아이들은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부는 약간의 유익은 있지만, 우리를 본질적인 행복으로 이끌지는 못합니다.
영화 소울은 존재적 삶의 방식에 대한 통찰을 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MIEwbbdedE&t=1185s
주인공 조 가드너는 재즈 뮤지션이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평생 그 꿈을 좇아 열심히 살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해 좌절합니다. 이런저런 일이 생기고, 결국 조 가드너는 재주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이룹니다. 너무나 기다렸던 순간이 그의 삶에 현실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재즈 연주를 해 낸 그날 밤...
그날이 어떤 날보다도 적막하고 허탈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짜릿한 경험이었지만... 충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오히려 자신이 하잖게 여겼던 소소한 삶들과 그 안에 존재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충만한 경험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조 가드너의 삶은 소유와 쟁취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옮겨져 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예수'께서 바로 이 존재의 삶을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받쳐야 하냐는 물음에 '가이사에게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재물은 있으면 좋은 것이고, 없으면 더 좋은 것이었으며, 날아다니는 새의 필요도 채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