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음으로서 의미있는 존재
하이데거에 있어서 '현존재'는 핵심 개념입니다.
현 존재는 독일어로 'Dasein'이라고 합니다. 'Da'란 '거기','sein'은 영어의 Be동사와 같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Dasein'은 '거기에 있음'이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있다'
하이데거 철학을 처음 접한 분이라면 어쩌면 이 말에 실소를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거기에 있지, 거기에 없냐?'라고 라고 말이죠 ^^
사실은 '거기에 있다'는 것이 무슨 큰 철학적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지 밀러 감독의 영화 '매드 맥스: 22세기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분노의 도로'에는 임모탄(Immortan)이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그는 멸망한 세계를 지탱하는 세 존재 중 하나인데, 그 세 존재는 '물,가스, 무기'입니다. 임모탄은 '물'을 소유하며 세계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데요. 이 물은 또한 '종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 가스, 무기'를 소유한 자들은 서로의 자원을 교환하면서 견고하게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임모탄은 '영원 불멸'을 의미하는 임모탈(Immortal)로 부터 따온 이름입니다. 그의 지배하에는 '워보이(War boy)'가 있습니다. 임모탄의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유지해주는 존재들입니다.
워보이들은 임모탄에게 충성을 바치면, 그를 통해서 '천국(Heaven)'에 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워보이는 처참한 삶을 살아가지만, 오직 임모탄을 통해서 천국에 갈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uektvXgqDI
워보이에게 현실은 고통스럽고, 벗어나야만 하는 공간입니다.
이 고통의 공간을 벗어나 영원한 행복이 있는 어딘가로 가는 것만이 그들에게 구원이 됩니다.
워보이들은 임모탄을 위한 그들의 용맹을 증명함으로써 고통의 현실을 벗어나 영원한 세계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1843년, 마르크스는 자신의 논문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종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의 아편이다.”
마르크스 시대에 아편은 일종의 진통제였습니다. 마르크스 자신도 종기가 났을 때 아편을 진통제로 복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은 “종교는 인민의 진통제”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해도 될 듯합니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었습니다.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억압적 시스템의 굴레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탄식의 통로가 종교였습니다.
종교는 심장 없는 생명에게 심장이었습니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없는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종교는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느낄 수 없는 현실 속에 유일하게 인간임을 알게 해주는 가느다란 빛줄기였습니다.
아무런 소망도 없는 사람들에게 종교는 유일한 진통제였습니다. 종교를 믿음으로 현실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신은 인간의 탄식이며, 심장이고, 영혼이라는 고백으로 바꾸어 본다면 오히려 감동을 주는 말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마르크스는 이런 측면에서 종교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는 자본주의가 태동하여 약진을 하던 시기로 제동장치 없는 자본의 힘이 인간성을 짓누르던 시기였습니다. 무자비한 노동의 착취로 기본적인 존엄성 마저 담보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부르주아(경제권력)에 의해 장악된 불의한 현실을 종교권력이 정당화해주는 수단으로써의 종교를 말한 것입니다. 정작 바꿔야 할 불의한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날 선 양심의 바늘이 엉뚱한 곳을 향하도록 속이는 종교를 언급한 것입니다.
당시 종교는 인간이 겪는 불합리한 현실, 억압된 상황을 일깨우지 못했습니다.
성경의 모세는 이집트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 불합리하며, 신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좌시하지 않으신다'는 메세지를 분명히 던졌습니다.
반면, 마르크스 시대의 기독교는 모세의 메세지를 던지지 않고, 오히려 불합리한 상황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현실은 원래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정의를, 어떤 의미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오직 영원한 하늘에 소망을 두십시오. 오직 신을 믿으세요. 그분께서 여러분을 이땅에서 영원한 곳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현실의 한계, 고통을 '악'으로 규정하고, '영원한 것, 고통 없음'을 '선'으로 규정하는 생각은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을 낳았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부정한 곳으로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월터 브루그만이라는 신학자는 그의 책 '안식일은 저항이다'에서 종교의 역할은 불합리한 현실을 폭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의 원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또는 더 먼저는 파르메니데스일 것입니다.
플라톤은 보이지 않는 세계 '이데아'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우리가 살아가는 감각적 현상 세계는 불완전한 그림자의 세계라고 했죠.
여기에 가치 판단이 들어갑니다.
이데아의 세계는 '좋은 세계' 현상 세계는 '나쁜 세계'.
플라톤의 생각에는 가장 중요한 전제가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은 좋은 것이다'라고 말이죠.
영원한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한 플라톤은 가변적인 세계를 그린 '미술'은 하등한 것으로 여깁니다.
늘 변하는 '감정'에 대해서도 부정적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평정심을 가진 절제하는 인간을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만이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해서 중세를 넘어 근대를 지배하던 '영원성'에 대한 추구는 현대로 넘어 오면서 거세 저항을 만나게 됩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영원성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변화와 소멸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거부합니다.
그의 'Dasein'이라는 개념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는 인간을 객관적이고 표준적인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객관화, 표준화는 불변의 개념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불변의 개념으로 인간의 다양성과 실존성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인간 존재란 시공간 안에 존재하되, 동일한 시공간이 아닌 각각의 실존이 독특한 시공간에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Dasein; '거기에 있음'에서 '거기'는 각 '실존'이 처해있는 다양한 상황입니다.
눈을 떠보니 영화관이었습니다. 사방은 깜깜한데, 스크린에서는 쉴 새 없이 화면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어둠이 익숙해질 만큼 되니, 주변에 수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두 남자가 나왔습니다. 그 두 남자는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나는 궁금했습니다.
‘저 두 남자는 왜 다투고 있지?’
곧 이어 영화는 그 남자가 왜 다투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두 남자는 형제였습니다. 그 형제에게는 아버지가 있었고,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이 형보다 더 많은 유산을 물려 받았습니다.
적은 유산을 물려 받은 큰 형은 동생에게 찾아가, 공평하게 유산을 나눠가질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이를 거절했고, 두 사람은 다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남자들의 ‘욕심’이 싸움의 원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두 형제가 왜 싸우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곧 이어 영화가 끝이 났고, 사람들이 영화관으로 빠져 나갔습니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으로 나와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영화관 밖에는 수십 개의 영화관이 존재했으며, 그들은 모두 ‘두 남자가 싸우는 이유’라는 제목의 동일한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중 한 개의 영화관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세계에는 수 많은 Dasein이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Dasein 은 이런 다양한 시공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다양한 시공간에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존재가 인간이라 말합니다.
각자는 그 시공간에서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면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현존재는 철학적인 물음을 물을 수 있는 존재 유형인데...생각은 현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여러 방식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가장 근원적인 것은 아니다. 현존재의 원초적 요소는 '세계-내-존재 (being-in-the world)이며, 생각은 세계와 마주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우리는 현존재를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인생을 펼쳐가는 존재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은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개발하는 것이다. 애당초 우리는 물리적이고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내던저졌다. 하이데거는 이 '던져져 있음(thrownness)'을 현존재의 '사실성'이라고 말했다."1)
고전적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이미 인간을 하나의 규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질문은 타자가 타자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질문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거기 있는 나는 어떠한 존재로 존재하는가?'
"하이데거가 인간이라는 현존재에 부여한 가장 근본적인 특권은 '존재물음'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2)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은 무엇을 정의한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 질문에 대해 과연 우리가 답할 수 있는 것인지.
인간이 무엇이라고 정의한 들 그것이 정말 각자의 실존에 의미를 밝힐 수 있는 것인지.
오히려 그 질문은 내가 나에게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의미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물을 때 답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1) 엔서니 케니, [현대철학]
2) 박영욱,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눈을 떠보니 영화관이었습니다. 사방은 깜깜한데, 스크린에서는 쉴 새 없이 화면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어둠이 익숙해질 만큼 되니, 주변에 수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영화관이었습니다. 사방은 깜깜한데, 스크린에서는 쉴 새 없이 화면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어둠이 익숙해질 만큼 되니, 주변에 수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