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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Jun 12. 2021

하이데거의 '근본기분'에 대하여

경이의 감정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던 20대 중반. 

여느 날처럼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직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집이 남성역 근처였고, 직장은 논현동이었기 때문에 고속터미널에서 환승을 해야만 했습니다. 

지하철이 고속터미널역에 도착하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밀물처럼 들어 옵니다. 자칫 잘못하기라도 하면 물결에 휘말려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갈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날도 고속터미널에서 빠져나가는 썰물에 합류하여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으로 올라갈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갈까를 고민하다 동선이 겹쳐서 에스컬레이터로 밀려 올라갔습니다. 잠시동안의 휴식...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눈을 들어 주변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다들 어디로 가는거지?" 

갑자기 마음의 현기증이 일어났습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나는 다른 승강장으로 이어지는 긴 복도의 나무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끝도 없이 밀려 들어 어디론가 가버리는 사람들을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쳐다보았습니다. 

마음 속에서 계속해서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다들 정말 어디로 가는거지?" 

출처: 모르니까 타임즈

나무 의자에 앉아 맨들거리는 타일 벽에 뒷 머리를 기댔습니다. 무엇을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생각하기 위해서 천장을 바라 봤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시골에 살았습니다. 

집 앞에 좌우로 1km 정도 되는 밭이 있었고, 그 건너에 개울이, 그 너머에 스키장 슬로프처럼 펼쳐진 산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5월의 봄 날. 

나무의 어린 잎이 올라오고, 각종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르는 향연의 계절이 우리 집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15살이나 되었을까요? 

그 어린 나이에 그 풍경이 얼마나 감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 저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가슴을 타고, 한 마디 비명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야!" 

나는 의자를 하나 가져와 집 앞에 놓고는 그곳에 앉아 선물처럼 주어진 풍경 속에서 깊은 안식을 취했습니다. 

아무런 값도 지불하지 않은 채. 


고속터미널 그 나무 의자에 앉아 어린 시절 봄날이 주었던 경이로움을 그리워했습니다. 


소외

어느날 갑자기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몇해 전, 한 뮤직비디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곽진언의 '나랑 갈래'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 입니다. 

 

시내를 지나는 버스 속에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사람, 피곤에 지친 사람, 뭔가에 화가 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의 테두리 안에 앉아 있습니다. 정해진 길을 따라 하루에도 몇 번을 오가는 버스. 

버스가 갑자기 속력을 냅니다. 그리고 정해진 길을 벗어나 벚꽃이 가득한 어느 시골길로 들어섭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로부터 시선을 돌려 창 밖의 펼쳐진 풍경을 바라봅니다. 

버스는 바다에 도착하고, 사람들은 그 해변에서 각자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gWcoD3TnR0


하이데거는 세계의 존재를 경이의 감정으로 보지 않고, 기술문명의 이해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외'되었다고 말합니다. 존재의 열린 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세계를 단지 이해관심의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에 스스로 참 세계로 부터 단절되어 버리는 현상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쓸모가 있는가'라는 관점을 가지고 다가가서 대상을 파악하고, 소유하여, 자신을 위한 쓸모의 존재로 대상을 전락시킬 때 그 대상은 스스로의 존재의 빛을 감춘다고 했습니다. 

(영화 미나리에서 제이콥이 모든 사람은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아들에게 강조하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부분에서 만큼은 마틴부버의 관점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마틴부버는 대상이 존재의 빛을 감추게 되는 것은 그 대상이 자신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수단화시키려는 주체가 스스로의 세계 속에 갇혀 버린다고 했습니다. 

마치 '내가 저 사람을 이용해먹어야 겠다고'고 생각할 때, 이용당할 위기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감추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용하려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차가운 세계 속으로 밀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즉 귀책사유가 냉혹한 주체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출처: 모던타임즈

인간 관계 안에서도 이런 소외가 발생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진정한 관계를 위해서 다가가지 않는 사람은 지속적인 소외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 주변에 사람이 많을 지라도 '소외'현상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이데거는 기술문명 사회 속에서 이러한 소외 현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외'가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우울하게 만들고, 비통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수많은 물건들로 우리의 방안을 가득채우지만, 정착 우리는 그 물건들 더미에 갇혀 시름 시름 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아바타 

영화 아바타는 세계와 전혀 다른 관계맺음을 하고 있는 두 종류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한 종류는 기술문명의 이해관심의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지구의 자원을 다 사용해버립니다. 자원은 고갈되고 자원 채취를 위해 우주 식민지를 개척합니다. 그들이 도착한 행성은 '판도라'압니다. 

판도라에 도착한 인간은 '나비족'을 만나게 되고, 나비족이 소중히 여기는 나무 밑에 자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나무를 제거해버리고, 그 밑에 있는 자원을 채취하려고 하지만, 그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라도 나무를 지키려고 하는 나비족과 맞서게 됩니다. 

결국 오로지 이해관심에 매몰된 인간은 기계 안에 갇혀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됩니다. 


영화 아바타는 인간이 어떻게 소외되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원 채취를 통한 '이득'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그 세계에 갇혀 나비족이 누리는 충만하고, 살아있는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채 '소외'되어 버렸습니다. 

영화 미나리의 제이콥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신의 주위에 존재하는 진정한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결국 불이 나서 성공이 소실된 다음에야 자기 주변에 있는 소중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제이콥은 소외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역시 생존의 세계에 갇혀 존재들로부터 소외 된 것은 아닐까요? 


'불안'이라는 근본기분

하이데거는 '소외'되어 있는 인간은 문득 문득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이 불안은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불안'을 잘 표현해주는 영화가 매트릭스 입니다. 

주인공 앤더슨는 대기업의 프로그래머입니다. 좋은 회사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좋은 이웃으로 불리는 네오는 늘 뭔가 '불안'한 기분에 휩싸여 있습니다. 

밤마다 그는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기계의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는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영화 매트릭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도 이런 '불안'에 빠져 있는 듯 합니다. 뭔가 알 수 없는 '허무함'과 '무의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안의 근원을 적극적으로 찾아 해소하기보다는 도피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불안이란 기분에서 우선 도피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분에 빠져서 훌륭한 인적 자원으로 인정받는 상태를 무의미하게 생각하게 되면 아무래도 생활에 활력이 떨어지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데 지장이 있기 때문입니다."1) 


도피는 일시적일뿐 결국 상황은 더 악화될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불안의 감정이 단지 '기술문명'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이 모든 면에서 존재와의 만남이 아닌, 대상을 수단화 시키고, 이해의 관계 안에 갇힌다면 이런 불안은 해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경이'라는 근본기분

'존엄하게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쓴 게랄트 휘터는 신경생물학 교수입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 한 노신사의 이야기로 책을 시작합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 숲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놀았습니다. 어느 날 한 노신사가 그 평범한 솦 속의 바닥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자를 포함한 아이들은 그 노신사가 무엇을 그토록 열심히 보고 있는지 궁금해 다가갔습니다. 

노 신사는 땅 위에 작게 핀 꽃을 바라보며 그 꽃의 모양새와 향기, 그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얼마나 아름답고, 독특한 것인지를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저자에게 그 꽃이 그저 이름없는 존재가 아닌 하나의 존엄한 존재로 다가오게 되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이 그러한 존엄성을 경험하는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각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명의 다양성을 파괴하거나, 인간의 내면의 다양성, 즉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잠재력을 억누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에게는 자신이 하고있는 일,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자신이 생각하는 존엄이라는 가치에 부합하는지를 돌아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생각과 행동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에서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행동이 자신이 존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에 모순될 경우 내면에 일어나는 동요를 느껴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야만 자신의 존엄하지 않은 행동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존엄한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2)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자들에 대한 지배의지에서 벗어날 때 이제 모든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 전체가 자신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지배의지를 버릴 때 존재를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게 되는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여름 밤이 되면 집 마당에 돗자리를 갈아놓고 하늘을 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면서 '경이'로움을 경험했는데요. 그러한 경이의 감정은 나의 삶을 일생동안 지탱해오는 힘이 되었으며, 그러한 경이감을 경험하는 나라는 존재의 존엄함을 버리지 않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영화 '초록물고기'를 보면 막동이라는 주인공이 조직 폭력배의 일원으로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 자신이 존엄성을 훼손한 주인공은 그 무너져 가는 기분을 벗어나기 위해 '작은 형'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여보세요?

- 어, 큰성이야?

- 큰성, 나야 막동이

- 엄마는?

- 아이, 엄마 어디 갔어!

- 응? 어, 나? 나 잘 있어 괜찮아.

- 큰성, 전화 끊지 마. 전화 끊지 마, 전화 끊지 마. 전화 끊지 마.

- 큰성, 생각나? 빨간 다리? 빨간색 철교.

- 우리 어렸을 때 빨간 다리 밑으로 물고기 잡으러 많이 다녔었잖아.

- 내가 저 언젠가 초록색 나는 물고기 잡는다고 그러다가 쓰레빠 잃어버려 가지고 큰성이랑, 형들이랑은 그냥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쓰레빠 찾으러 다녔었잖아. 순옥이 그 병신은 벌에 엉덩이 쏘여 가지고 엉덩이 세 개 됐다고 둘째 형이 놀리고 그랬었잖아.

- 큰성, 그 때 생각나?

- 그 때 생각나?

https://www.youtube.com/watch?v=-k0mKiH3CPw

주인공은 모든 존재가 부정당하는, 오로지 자기 생존을 위해서 모든 존재를 존재자로 전락시켜 지배하려는 비열한 세계의 희생양입니다. 그는 타인을 살해한 후 자기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깨달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어린 시절 일상에서의 '경이'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어쩌면 현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경험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빨간 다리 밑에서 고기를 잡던 아름다운 시절. 

그는 그 다리 밑에 헤엄쳐 다니는 '초록 물고기'와 그와 함께 했던 형과의 경이의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그 반대의 지점에 서게 됐을 때 '불안'의 감정이 떠오르며 '경이'의 시간을 찾아 전화를 걸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경이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안의 감정에 시달리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광야에서 신 앞에 서다

성서의 모세는 이집트 제국의 왕자였지만, 살인을 저지른 후 사막으로 도망칩니다. 

그는 그곳에서 40년을 보내며 완전히 잊혀진 존재로 살아갑니다. 

이집트 왕자로 살았던 40년의 시간은 제국의 힘을 소유한 자로서 살았을 것입니다. 

자기 앞에 있는 모든 존재를 존재자로 전락시킬 수 있는 비운의 힘을 지닌 존재로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사막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낸 그는 그 자신도 결국 하나의 존재자로 전락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그가 어느 날 한 산에서 신을 만나게 됩니다. 

신은 모세를 부릅니다. 내가 너를 잊지 않았다고, 내가 너를 보고 있었다고, 그리고 너는 아직 할일이 남았다고 말합니다. 신의 부름 앞에 모세는 일어나 거대한 이집트 제국을 맞서 노예를 해방시킵니다. 

제국의 힘 앞에 '존재자'로 전락한 수 많은 사람들을 고유한 '존재'로 살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신의 모세를 '존재자'가 아닌 '존재'로 바라봐주었고, 그 시선 앞에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군인지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제국 앞에 모두가 하나의 부품처럼 전락해버린 이 시대에, 우리는 서로를 존귀한 존재로 불러주어야 합니다. 그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1) 박찬국,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2) 게랄트 휘터, 존엄하게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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