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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Jul 09. 2021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의 본질 1

하이데거의 실존개념을 통해 4차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함

우리는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헤겔은 '역사'를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펼치는 투쟁으로 보았는데요. 이와 같이 산업 혁명도 자연을 상대로 펼치는 투쟁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증기 기관을 발명하여 인간을 넘어서는 노동력의 원천을 확보한 인간은 4차 산업 혁명의 기수로 대변되는 AI와 로봇을 통해 인간을 뛰어넘는 지능과 물리력을 지닌 노동력을 확보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영혼(지능)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는 존재로 본다면, AI+로봇은 영혼(지능)과 육체를 가진 또 하나의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AI+로봇(휴머노이드)은 인간인가? 아니라면 무엇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아마 이 질문에 많은 분들은 '휴머노이드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왜 그런가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적 수준의 휴모노이드도 거의 인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9CrZW17yPwA

저는 하이데거가 인간을 일컫는 '실존'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휴머노이드가 왜 인간이 아닌지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사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좀 긴 글이 되겠지만, 저와 함께 여행하시면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무언가를 정의義(definition) 한다는 것에 대해 별 생각이 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상식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정의하는 행위에는 '특정한 시각'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역사'를 정의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역사'는 절대정신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은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다"라고 역사를 정의한다면 역사의 발전은 신적인 정당성을 얻게 되고,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시도는 정당한 행위가 됩니다. 

역사가 '절대정신(신)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라면, 이미 이루어진 역사는 신의 자기실현으로서 절대적 정당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얻어낸 모든 자유는 정당한 것이 될 것입니다. 


반면 "역사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결과이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라고 본다면 강자는 더 강해지고, 약자는 더 약해지는 것이 정당한 과정이 됩니다. 

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짓다

'정의'한다는 것은 일종의 세계관이며, 세계관을 통해서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사실 '정의'하는 행위 이전에 '질문'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질문에도 '관점'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특정한 '관점'에서 물어진 질문이 특정한 '정의'를 이끌어 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동일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질문입니다. 

앞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은 이미 '인간'을 하나의 의식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뒤에 있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인간'을 하나의 사물의 수준까지도 염두한 질문으로 '유물론적'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질문 안에 담긴 '관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질문이 던진 그물망 안에서 '답'을 제시하려 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특정한 관점에 갇혀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몸과 영혼의 관계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대답은 '몸과 영혼'이 무엇이며,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1990년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강도에 의해 총을 맞은 '샘'이라는 주인공은 몸을 잃고 영혼만이 남았지만, 그 상태에서도 여자친구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몸이 없이는 물리적 세계에 개입할 수가 없어 다양한 방법으로 여자친구를 도와주는 재미가 관전 포인트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몸과 영혼에 대한 고전적인 생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8L55Mv1B7Q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시도된 접근은 역시 인간을 육체와 영혼이란 도식에서 보는 것이다. 육체와 영혼은 각각 무엇이며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질문은 아득한 옛날 종교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보았던 때부터 오늘날 신경 물리학적으로 인간을 연구하는 데 이르기까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다."1) 


철학사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몸과 영혼의 관계에 관해서 다양한 입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인간 존재의 수수께끼는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고, 특히 다면성만큼 큰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고, 전혀 다른 관계에서 부딪치며, 가변적인 상황에서 만날 수 있다. '몸', '영혼', '정신'은 이렇게 변모하는 전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단어요, 지칭이다. 이 명칭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인간을 보는 시선, 즉 인간을 개인의 측면에서 보느냐 혹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보느냐, 다른 동물과 물체와 같은 평면에 두고 보느냐 혹은 우월한 것으로 보느냐, 구체적인 세계나 신들의 영역과 분리된 존재로 보느냐 혹은 상관관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2)


가장 쉽게 생각하는 것은 몸이 있고, 우리의 영혼이 몸 안에 있으며 영혼의 활동이 정신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이 '안에'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몸에 있는 공간 어딘가에 영혼이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몸 밖 어느 특별히 마련된 별도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휴머노이드는 물리적인 기계 안에 컴퓨터가 탑재되어 있어 몸을 조정합니다. 인간의 영혼도 그와 같이 몸 안 어딘가에 영혼이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뇌가 영혼일까요? 


영혼과 몸의 이원론: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철저히 몸과 영혼을 분리하였습니다. 그는 영혼은 '정신적인 것'으로 몸은 '물질적인 것'으로 대치시켰습니다. 영혼과 몸을 '사유하는 본체 res cogitans'와 '연장적인 본제 res extensa'로 구분하고 분리한 결과 인간의 몸을 복잡하고 생동력이 있는 기계로 묘사하고, 영혼은 몸과 달리 연장성과 분할 가능성이 아니라, 의지와 오성, 의심과 상상력 등을 모두 포함하는 사유 작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몸의 작용에 영혼을 연결 시킨다고 말했습니다. 

향후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인간관을 '기계 속에 들어 있는 유령 the ghost in the machine'이라 불렀습니다. 

송과선을 통한 영혼과 몸의 설명

그는 '배안에 있는 선장'의 모델을 이용해서 영혼과 몸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가 단순히 영혼이 배의 방향을 설정하는 선장이며, 몸은 그저 배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 좀 더 연결되어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혼과 몸의 결합은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본질적인 요소로, 이 결합이 없이 인간은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역설한다." 3) 


몸과 정신을 완전히 분리해서 따로 관찰하면, 이 둘 사이의 공통점이 없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각이 극단화 되어 영혼을 묘사할 때, 먼저 몸의 속성을 나열한 다음 그것들의 부정으로 묘사하는 사례가 종종 있습니다. '영혼은 형체나 색깔이 없다', '영혼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등의 표현입니다. 

또는 영혼을 눈에 보이는 몸을 가진 인간의 내부로 묘사하는 것도 영혼을 단지 공간의 일부로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연 인간을 영혼과 몸을 딱 잘라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이상하게 연합된 것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영혼과 몸의 관계를 상호 부정적인 관계로 보는 것은, 곧 엄격한 이원론은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막다른 골목을 뜻한다." 4)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성: 플라톤 

몸과 영혼의 이원론을 철학적으로 보급한 자로 데카르트와 플라톤을 둡니다. 플라톤은 데카르트보다 2천 년 전에 일찌기 그의 철학에서 몸과 영혼을 엄격히 분리하였습니다. 그 이후 자주 등장하게 된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심지어 몸은 영혼보다 훨씬 열등하다는 것이 통념이 되기도 했습니다. 


"육체적인 욕구나 욕망은 모두 포기하고, 영혼이 내세에서 누릴 정신적인 순결의 추구가 가장 이상적인 삶의 태도가 되었다. 이 태도는 성 윤리, 교육, 철학적 인간관, 선과 악의 이념, 신학적 개념 그리고 여러 다른 부분에 큰 영향을 미쳤다."5) 

플라톤의 이원론과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어떠한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요?


"몸과 영혼의 이원성이 데카르트와 플라톤의 철학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플라톤을 단순히 데카르트와 똑같이 취급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먼저 그의 방법론적인 출발점으로 삼은 다음, 사유하는 본체와 연장하는 본체를 같은 평면 위에서 나란히 분리해 놓았다. 반면 플라톤은 몸과 영혼을 같은 평면에 두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몸과 영혼은 나란히 놓여 있는 두 개의 사물이 아니다. 오히려 영혼은 '움직이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 an existent in movement'이고, 정신적인 태도 설정과 관계있다. 따라서 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6)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에서 시칠리아 의학파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그는 영혼의 작용이 환경과 몸의 결과물이라는 주장을 거부하고, 영혼은 몸에 복종하지 않으며 오히려 몸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영혼이란 물질적인 것과 반대되는 어떤 독특한 것이라는 입장이 벌써 플라톤에게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플라톤은 몸과 영혼의 관계를 '배 안에 있는 선장'의 모델로 설명했는데요, 그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등 플라톤 이후의 철학자들은 이를 영혼과 몸에 관한 플라톤의 대표적인 가르침으로 생각했습니다.  


초기 대화편에서 몸은 영혼의 도구나 매개물이 아니라, 영혼을 방해하고 심지어 오염시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몸과 분리시킴으로써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육체적인 것이 저급한 욕망의 자리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론적인 문제와 직접 관계되어 있습니다. 즉 감각적인 지각은 영혼을 제한하며, 영혼이 진리와 접촉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눈과 귀 등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온 것은 모두 그 사물 자체에서 제거해 버려야 한다. 영혼은 욕망으로 생긴 감옥 속에 갇혀 있어, 창살을 통해 바깥을 내다본다." 7) 


플라톤은 영혼이 몸과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영혼을 단순히 몸과 같은 성질을 가진 동일한 평면 위에 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 높은 차원의 세계에 속해 있는 영혼은 물질적 세계를 더 나은 차원으로 이끄는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성 문제는 여기서 존재론적으로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확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현실을 기준으로 이 지상 생활을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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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

1), 2), 3), 4), 5), 6), 8)  반 퍼슨, <철학적 인간학 인문, 몸, 영혼, 정신>, 손봉호, 강영안 역

7) 플라톤, 파이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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