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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Jul 10. 2021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의 본질 2

하이데거의 실존개념을 통해 4차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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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저는 영혼과 몸의 관계에 있어서 '이원론'적 입장을 소개하였습니다. 

영혼과 몸은 각각 개별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때로는 별도의 특별한 공간에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을 데카르트와 플라톤을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원론적인 입장의 문제점은 분리 독립된 두 실체가 어떻게 상호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데카르트는 '송과선'이라는 중간 매개체를 만들어 내야 했고, 플라톤은 영혼이 몸에 갇혀 있으며, 물질적인 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치부해버렸습니다. 

만족스럽지 않은 설명입니다. 송과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 또한 물질적인 것인데, 송과선 자체와 정신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그림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현실적이며, 사후 세계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빈약합니다. 


다음으로 설명할 사상가들은 '이원론'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종의 '환원주의'적 입장을 취합니다. 

포이에르바하는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버클리는 물질적인 것을 정신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일원론'적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환원을 통해 일원론적 입장을 취하게 될 경우, 정신과 몸의 연결고리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한쪽 영역이 다른 하나의 관점에 의해서 잠식당해야만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영혼과 몸의 관계에 있어서 환원주의적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물론적인 일방성: 포이에르바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가는 여정에 있으며, 지금 우리는 유물론적 시각을 검토해보려고 합니다. 

유물론적 시각을 검토하기에 앞서 한 가지 개념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는 것이 이해하는데 도움일 될 것입니다. 

철학 용어 중에 '대상' 또는 '대상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대상이라는 말은 일상적인 용어로 '내 앞에 있는 무엇'을 말합니다. 

이 대상이라는 말을 조금 더 현대철학적으로 분석해보자면, '대상'은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내가 식탁 앞에 앉아 있고, 그 앞에 컵이 하나 놓여 있다면, 나는 그 컵을 손으로 들어 옆면과 밑면, 컵 속을 들여다보면 그 컵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컵은 하나의 '대상'입니다. 


반면, 엘리베이터에 탔다고 생각해봅시다. 1층에서 타고 올라가는데,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춥니다. 

한 사람이 엘리베이터로 들어와 9층을 누릅니다. 나는 이 사람이 왜 9층에 가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왜 9층에 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 사람을 요리조리 관찰하면 알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입으로 그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컵도, 사람도 모두 내 앞에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컵은 관찰이 가능하며 관찰된 것 이상의 신비는 없습니다. 

반면 인간에게 관찰된 것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신비의 영역에 존재합니다. 


유물론적 관점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신비의 영역'도 사실은 방법상의 문제이지 모두 관찰 가능한 영역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영혼과 몸의 관계에 있어서도 '몸'만 있을 뿐이지 '영혼'은 몸이 작용하고 난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입장입니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19세기 독일 유물론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세련된 철학자입니다. 그는 다른 유물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몸의 배후에 신비로운 다른 존재(영혼)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오관과 연결될 수 있는 것만이 현실적이다. '몸'과 '영혼', '이 두 본체는 인간 오성이 고립시킨 추상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둘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느냐는 물음은 공허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상상 속에서 그려진 사물간에는 상호 작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감각적인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따라서 몸과 영혼의 상관 관계를 생각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 감각이 작용하지 않는 곳에는 연결이나 연합을 찾아볼 수 없다." 1)


'영혼'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몸만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정신적인 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포이에르바하에게는 몸이 곧 영혼입니다. 몸은 단순히 화학 분자의 결정체가 아니라 타인 앞에서, 타인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인간 자체입니다. '영혼'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서 하나의 부대 현상이고, 자기 존재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생긴 주관적인 착각에 불과합니다. 


"영혼은 몸에 붙어 있을 때, 비로소 '어떤 무엇'이 될 수 있고, 몸의 표현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뼈나 근육과 더불어 영혼은 인간의 개인성을 표현한다. 여기서 '표현'이란 말은 가령 생각은 그것을 말로 표현했을 때 생각이 되고, 감정은 그것을 노출시켰을 때 감정이 되며, 어떤 사람이 가령 발걸음 소리로 그 사람으로 확인되는 경우와 마찬가지 뜻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심리학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이성적인 존재로 일컫는 영혼보다 우리의 호흡작용이 더 본질적이다."2)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은 유물론입니다. 그의 철학이 유물론인 까닭은 영혼을 궁극적으로 육체적인 범주에 환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이에르바하에게 독특한 점은 그가 인간을 물질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심리학'과 '생리학'을 구분합니다. 

나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면 '심리학'적 접근이 됩니다. '주체와 대상'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내가 타인을 바라볼 때는 '생리학'적 접근이 됩니다. 외부로부터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상당히 실존적 시각을 내포하고 있으며, 포이에르바하 자신은 유물론자였지만,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사유는 뇌와 구별되지만, 그 자체로 보면 그것은 뇌의 활동이다." 


유심론적 일방성: 버클리 

버클리는 영혼과 몸의 관계에 있어서 몸으로 지각하는 세계를 하나의 관념적 세계로 환원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모두 관념일 뿐이라면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반문을 하겠지만,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철저한 유심론을 시도하면, 결국 인간은 그가 살고 있는 현실과 세계에서 고립되어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가지는 인간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조지 버클리

저는 버클리의 사상을 연구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버클리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 곰곰히 생각하고 있던 차에 제 앞에 놓여 있는 애플의 트랙패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애플의 트랙패드는 '포스터치'라는 기능이 있는데요. 과거에는 컴퓨터 상에서 무언가를 지정하려고 할 때 물리적 힘을 가하고, 그 힘이 트랙패드에 전달 

https://www.youtube.com/watch?v=SS6MjObSxjs

되어, 트랙패드 안에 있는 물리적인 버튼을 눌러 가상화 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포스터치는 더 이상 물리적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저 눌러지는 느낌을 전달해줄 뿐입니다. 물론 눌러지는 느낌을 주지 않아도 작업은 가능할 것입니다. 다만 눌러지는 느낌에 대한 인간의 만족이 있기 때문에 느낌을 설정한 것 뿐이지요. 


버클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그저 정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내 앞에 꽃 병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꽃 병은 나로부터 약 1.5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이 꽃 병을 만지고 싶다면? 나는 내가 팔을 뻗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꽃 병은 1.5m 거리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요? 

조금 현대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외부에 있는 사물은 빛을 통해서 나의 시신경으로 들어 옵니다. 그리고 나의 뇌에서 그 정보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꽃 병 자체가 아니라 꽃 병의 정보입니다. 

꽃 병이 나의 뇌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꽃 병은 거기에 있고, 꽃 병의 '상image'은 내 안에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사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무언가에 의해서 매개 된 이미지 입니다. 


"모든 편견이나 선입견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감각적 지각을 관찰해 보면, 그것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성격이 나타난다. 바깥 세계의 특징은 서로 거리 간격이 있는 것이다. 저기 놓여 있는 책은 나와 떨어져 존재하고, 창문을 통해 보이는 저 나무는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거리 자체를 보는가?...거리란 눈으로 볼 수 없고, 다른 여러 관념을 통해서 특히 방금 열거한 여러 요인을 통해서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버클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공간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공간이라고 말해주는 다양한 관념의 도움으로 공간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라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도 나의 외부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무언가를 경험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요?" 


저는 이 쯤에서 또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 납니다.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모피어스를 만나 매트릭스가 무엇인지 설명을 듣습니다. 그가 속해 있던 세계의 진실은 인간은 잠들어 있고, 세계는 황폐화 되었다는 것입니

https://www.youtube.com/watch?v=bSnuVvwuDhs

다. 네오는 황폐화된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컴퓨터에 의해서 뇌에 주입된 세계를 현실로 보았습니다. 그는 가상의 세계에서 보았고, 들었고, 만졌습니다. 그에게 세계는 생생하게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주관성 안에 주입된 것이지 실제의 세계와 만난 것은 아닙니다. 

결국 네오가 속해 있던 세계는 관념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을 가지고 영화의 다음 장면을 본다면 난해했던 부분이 풀리게 될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uwG_eH7JzQ

"Do not try bend the spoon. That's impossible. Instead only try to realize the truth."

스푼을 휘게 하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대신에 오직 진실을 받아들이세요. 

"What truth?"

어떤 진실?

"There is no spoon. Then you'll see, that it is not the spoon bends, it is only yourself." 

스푼이 없다는 사실이요.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스푼이 휘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푼을 휘고 있는 자기 자신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요즘 가상체험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영화 레드플레이어 원을 보면 가상현실 기술이 오감을 모두 만족시키는 수준까지 올라 완벽한 가상세계가 창조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지만, 내 앞에 놓여 있는 애플의 트랙패드도 '포스터치'를 통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감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버클리의 생각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처음부터 관념의 세계이고, 우리는 그 관념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아닌가라는 질문에 반박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버클리는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즉,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그저 관념일 뿐이야. 다 매트릭스야"라고 말하는 것이 어떤 철학적 의미가 있을까요? 결국 우리 삶에는 아무런 변화나 영향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검증도 되지 않는 주장을 뿐인데 말이죠. 


"모든 감각적인 사물은 관념이다. 이 관념은 '오직 정신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물의 존재는 지각되는 데 있다는 구절은 현실을 증발시켜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지각되며, 그 배후에 숨겨 있는 본체의 그림자가 아님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4) 


버클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지각되는 현상의 배후에 사물의 본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본체가 물질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포이에르바하가 주장한 바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는 모든 현상을 물질적 작용으로 설명하려고 했지만, 버클리는 현상의 배후에는 '정신'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고, 우리는 그 정신 안에서 생생함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일 우리가 눈을 감으면 세계가 사라져 버리는가? 버클리는 현실을 정신에 관계된 것으로 보지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주변에 세계가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이 땅은 인간보다 먼저 창조되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정신은 한 개인의 정신이 아니라 '정신 일반 any minds whatsoever'을 가리킨다." 5) 


이제 버클리가 의도한 바가 나타납니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관념일 뿐이며, 우리의 뇌에 존재하는 이미지 외에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본질은 신의 정신 안에 구축되어 있으며,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은 어떤 본체 위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라도 정신과의 관계에서 보지 않고는, 즉 나의 정신이나 다른 정신이 그곳에 현존하리라는 기대가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나 거리는 다 같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현존의 상징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것은 무엇이나 만물 안에 계시고, 우리 가운데 거주하여, 우리의 존재를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표현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자연은 보편적인 상징의 성격을 띠게 된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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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5), 6) 반 퍼슨, 철학적 인간학 인문, 손봉호 번역

2) Wider den Dualismus von leib und Seele, Fleisch und Geist. 

4) A.A. Luce, Berkeley's Immaterialism (London, 1945), 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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