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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Jul 12. 2021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의 본질 3

하이데거의 실존개념을 통해 4차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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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몸과 영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철학적 인간학'의 두 가지 관점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이원론적 관점'으로서 몸과 영혼을 분리 독립적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이 입장에 선 철학자는 플라톤과 데카르트가 있었습니다. 두 철학자는 이원론적 입장에서 공통점이 있었지만, 플라톤이 영혼을 몸보다 더 앞선 것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환원적 관점'으로서 인간을 영혼의 입장에서만 보거나 몸의 입장에서 설명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전자의 예는 버클리이고, 후자는 포이에르바하 입니다. 


그럼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이원론적 관점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고(물론 몸과 영혼의 연결성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았습니다)환원적 관점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사에서 이 두 관점 중 하나가 압도적으로 발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이 두 관점이 나름대로 합리성을 가지고, 인간의 어느 측면을 설명하고는 있지만, 세계 전체를 마주하는 인간을 의미있게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맞는 말 같지만, 딱 와닿지가 않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본 글의 핵심 주제인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과 4차산업 혁명 시대의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인간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라고 했습니다. 세계 내 존재란, 인간은 세계 안에 존재하며 세계를 파악하고, 열려 있는 세계와 관계를 맺어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밤 하늘 아래서 별을 바라봅니다. 

별은 우리의 머리 위에 떠 있고,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별이 어디쯤에 있으며, 어떻게 그토록 아름답게 반짝이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게 됩니다. 

별과 우리는 모두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별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서 연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질문을 던지는 그 세계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별을 대상으로서 연구할 수 있는 우리이지만, 전체 우주 안에서 별과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의미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세계의 객관적 관찰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계적 상황' 안에 놓여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별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인간으로서도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는, 인간 자신을 연구함에 있어서 더 큰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아니 인간은 인간 스스로에게 객관적일 수 없으며, 대상이 될 수도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앞선 인간에 대한 오해를 발생시킵니다. 


아래는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이라는 그림입니다. 

한 남자가 거울 앞에 서 있습니다. 보통은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이 남자의 거울에는 자신의 뒷모습이 나타납니다. 자신의 얼굴을 보려면 뒤로 돌아서야 하지만, 그러면 거울을 볼 수 없습니다. 

르네마그리트는 파악될 수 없는 인간의 심연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려고 해도 명확하게 볼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존재입니다. 왜 자기 자신이 파악이 되지 않을까요? 


문제는 파악(이성적으로) 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우리 앞에 놓인 어떠한 것들을 파악하고, 이해하기에 적합합니다. 하지만, 그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칸트'가 자신의 책 '순수이성비판'에서 정리를 해 놓았습니다. 

이성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은 제한적입니다.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한계 밖에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려고 할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오류가 일어나게 되겠지요. 마치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데이터를 처리하려고 할 때 오류가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빵을 만든다고 상상을 해봅시다. 우리 손에는 별 모양의 빵틀이 주어져 있습니다. 

선반 위에는 커다란 반죽이 있고, 그 위에 별 모양의 빵틀을 찍어 별 모양의 빵을 만들 예정입니다. 

반죽의 모양은 별 모양이 아닙니다. 하지만, 빵은 별 모양이 나올 것입니다. 틀의 모양이 별이기 때문입니다. 

별모양의 틀을 가지고는 다른 모양의 빵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이성도 일정한 인식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이성뿐만 아니라 직관, 느낌, 믿음을 균형있게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앞선 철학자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성'의 능력을 경계선 밖으로 까지 밀고 나간 오류라 여겨집니다. 인간은 그보다 더 큰 존재이기에 '이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실존(存)으로서의 인간 

그렇다면 전통적인 인간 이해 방식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상식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질이 '이성'이 아니라 '실존'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존은 한자로 存 입니다. 앞선 글자는 '실질'이라는 의미이고, 뒤에 글자는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실존'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존'이라고 해도 '존재함'이라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데, 굳이 '실존'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SF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 원작 영화 '바이오센테니얼맨'은 가정용 보조 로봇 앤드류가 프로그램 오작동으로 자의식을 갖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입니다. NDR-114 로봇인 앤드류는 엔지니어의 실수로 회로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 문제로 인해 앤드류는 로봇으로서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지적인 호기심과 지능을 가지고 됩니다. 앤드류의 지적인 능력은 단순히 연산을 더 빨리 하거나 느리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생긴 지적 능력은 '질문'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하는 능력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Dh2cpT-DqM&t=347s


어느 날 바닷가에서 작은 아씨의 유리 말을 깨트린 앤드류는 '미안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목공을 배워 손수 '나무 말'을 만들고 이를 선물로 줍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나무 말을 주었다'는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물건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깊이 공감해야 하며, 선물을 줌으로서 그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는 신비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런 행위는 학습될 수 있지만, 학습으로 전부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 존재합니다. 


이전 철학자들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라고 하거나, 영혼의 존재 또는 육체적 존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진술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로 인간의 깊은 신비를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바이센테니얼맨의 앤드류가 로봇이냐 인간이냐를 말할 때 그의 구조를 해부한 후 '이것은 로봇이다'라고 선언하거나, 무언가를 인지하고,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서의 앤드류를 인간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그가 '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시선으로 세계를 마주하고 있으며, 자기 자신은 누구이고, 자기 앞에 펼쳐진 세계는 무엇인지 질문하는 '실존'입니다. 단순히 어느 공간을 차지하는 '연장된 실체'가 아니라 의식을 가지고 자신과 세계에 질문을 던지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를 인간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 한 신문에서 우리나라 자살률에 관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OECD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우리나라는 매 38분마다 한 명씩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연간 1,38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이 숫자를 근대적 방식으로 접근해서 작년보다 수치가 줄어들었으니 문제가 개선되었다고 하거나,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그 수치가 낮다고 말함으로서 아직은 위험한 수준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존적 방식에서 접근하면 어떨까요? 한 사람이 죽었더라도 그 한 사람의 세계 전체가 문을 닫는 것입니다. 한 명이 죽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존재했었던 것입니다. 

수치화 하는 방식이 주는 이점도 분명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 처럼 여길 경우 사회 전체가 생명을 경시하는 분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질은 바로 '실존'에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고민하는 인간의 존재.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존재가 바로 '실존'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대학에 들어가고 어떤 직장에 취직할 것인가와 같은 단편적인 문제를 넘어서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자신의 삶 전체를 문제 삼으면서 어떻게 사는 삶이 의미 있는지를 물을 수 있습니다. 호랑이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토끼를 언제 습격할지에 대해서 고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자신의 삶 전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뇌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인간 만이 그런 고뇌를 하지요. 인간만이 갖는 그러한 근본적인 특성을 하이데거는 '실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

과거 철학자들은 인간을 대상화하여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현대철학자들은 그러한 사유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측면을 훼손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훗설과 하이데거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이 인간에게 보여지는 또는 인간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현상학)을 따라 철학을 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봅시다. 

나에게 나의 삶은 유일한 것이며, 전부입니다. 누가 나의 삶을 관찰해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삶이 그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무게, 바르게 살아야 하는 책임감은 오롯이 나만의 것입니다. 내 삶에 대해 누가 뭐라고 이야기를 해도 결국 나의 삶을 이어가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감히 다른 이의 삶을 쉽게 논할 수 없다

지금까지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통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결론을 지어본다면, 인간이란 단순히 영혼과 육체가 어떤 비중으로 조합되어 있는가를 통해서는 한계적으로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영혼과 몸을 하나로 가지고 있는 총체적, 실존적 존재입니다. 

인간을 '대상'으로서 연구할 때 영혼(정신)과 몸을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생명을 가진 한 존재를 앞에 두고 그러한 설명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너는 어떤 기쁨을 누리고 있느냐?" 

"네가 얼마나 아프냐?" 

"너는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느냐?" 


99.9%의 인류가 기쁨에 차 있다고 하더라도, 내 삶이 절망적이면 나의 세계는 절망일 뿐입니다. 

한 인간은 그 존재 전체로 온전히 하나의 세계를 살아가는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어벤저스 '인피티니 워'에서 타노스는 스톤 다섯 개를 모아서 우주 인구의 절반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는 우주에 인구가 너무 많아질 경우, 우주가 혼돈을 겪게 될 것이라며, 인구의 절반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톤 다섯 개를 모아 인구의 절반을 사라지게 만들죠. 

그는 실존적 존재의 특별함을 '대상화'하여 통계적으로 접근하였으며, 자신이 의도한 희생(?)적 행위와는 상관 없는 '잔혹한 살인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의 조건

여러분은 인간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시나요? 

환경에 적응해온 생존 동물로 보시나요? 

아니면, 신비를 간직한 영원한 존재로 보시나요? 

선하다고 보시나요? 악하다고 보시나요? 

육체를 가진 기계인가요? 아니면 자기 결정권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인가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간을 인간으로서 규정해주는 것은 '이성'이 아닙니다. 

이제 AI 기술 덕분에 기계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몸을 가진 것도 인간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구나 정신과 육체를 가진 휴먼노이드가 나타날 날이 얼만 남지 않았습니다. 

휴먼노이드도 인간처럼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하지만, 휴먼노이드가 실존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단순히 실존의 형태로 프로그램 되어 있어, 실존적 질문을 던질 수는 있겠지만, 정말 자신의 삶에 대한 궁금해 하며, 염려함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간의 조건은 바로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문을 던지는 실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프로그램 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깊은 내면을 탐색하며 스스로 의미있는 삶을 창조해가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본래적 질문'은 초월적 영역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더 큰 물음의 장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하이데거는 인생의 진정한 물음을 회피하는 삶을 '비본래적uneigentlich 실존'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외면하면서 돈이나 명성과 같은 세간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이렇게 죽음에서 세간의 삶으로 도피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실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우리의 삶에 물어야 할 질문을 회피하고, 그 질문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계와 우리 사이에 본질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을 공부하면서, 인간은 영혼만도 아니고, 육체만도 아닌, 그 자체로 사유하며, 몸으로 살아가는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통합된 존재라는 사실에 깊이 동감했습니다. 


인간은 여기에 있는 존재 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현존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있으며, 마주하고, 바라보며, 관계맺고, 배워가고, 확장하는 존재. 

생각하고, 몸으로 만지며 경험하여, 삶의 의미를 창조해가는 존재입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존재는 초월적 영역과 가시적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이면서, 육체를 가진 통합적인 인간은 그 자체로 두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합니다. 

모든 물질이 마주하는 죽음 속에 있으면서도, 영원한 삶을 소망하는 우리는 존재적으로 두 세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휴먼노이드'와의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을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신비를 더 깊게 깨닫게 되었으며,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우리의 삶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1) 박찬국,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마르틴 하이데거>

* 이성이라는 단어는 좀 더 포괄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문맥에서는 '칸트'의 용어인 '오성'이 더 적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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