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주체에 대한 비판 / 강영안 교수님의 책 '타인의 얼굴'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우리는 니체와 하이데거를 통해서 근대적 주체개념에 대한 비판을 검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철학자들은 주체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을까요?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는 중세 수도원에서 벌어진 한 수도사의 죽음의 원인을 파헤치며 전개됩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인 윌리엄은 죽음의 현장인 베넥딕트 수도원으로 갑니다. 수도원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 단서를 찾던 윌리엄은 범인을 잡기는 커녕 오히려 연쇄적인 죽음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는 사건의 실마리가 수도원 장서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비밀스럽게 닫혀 있는 장서로 들어갑니다. 그곳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중 희극(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음)편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엄격한 금욕주의 생활을 하던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사들에게 희극은 금서였습니다. 불경건한 웃음을 유발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호르헤 수사는 희극 책에 독을 발라 금서를 읽으려는 수사들이 책장을 넘길 때 손에 독약이 묻게 하고 그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댈 때 중독되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움베르트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는 종교와 과학의 긴장관계를 그리고 있는데요. 인간의 감정을 극도로 제한하여 세속적 즐거움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중세 기독교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작품입니다.
19세기의 철학자 니체는 기독교적 전통을 포함해서 현상계를 넘어서는 선험적 주체/자아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이러한 선험적 주체가 일상과 생을 부정하는 귀결로 나아갔기 때문인데요. 그는 '생'을 혐오한 형이상학적 전통 전체를 해체하고자 시도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기독교의 신학, 근대의 형이상학을 비판했습니다.
"물리적 현상 배후에, 현상을 가능케 하는 어떤 행위 '주체'가 있다는 생각이나, 신체 배후에 신체를 움직이는 '정신'이 있다는 생각이나, 세계를 초월해 세계를 창조하고 섭리하는 '신'이 있다는 생각은 다 같이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근대적 주체와 형이상학을 해체한 니체의 대안은 무엇일까요?
그는 그저 주체와 자아를 소멸시켜버리는 것입니까? 자아/주체가 있다는 것은 현상 너머의 어떠한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본질적 실체를 연구하는 학문이 형이상학인데, 이는 신에 대한 연구와 깊은 연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에 대한 연구는 필연적으로 윤리적 문제를 다루게 되어, 인간에게 윤리적 지향점을 제시합니다. 윤리적 지향점은 생을 거부하고 금욕하여 도달해야 할 올바른 지점을 말하게 됩니다.
니체는 이러한 방식, 즉 현상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고방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그저 몸을 가지고 여기서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지, 그것 너머의 어떠한 본질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향점으로서의 원형, 주체, 자아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그 무엇도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느끼는 대로, 원하는 대로, 나의 삶을 창조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니체의 대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의 양심은 뭐라고 말하는가? 너는 너 자신인 바 그것이 되어야 한다.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논의를 보면 논리적, 보편적 주체가 되라는 말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와 같은 주체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단일한 주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룬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니체의 논지에 어긋난다. 나 자신인바, 그것이 된다고 할 때 '나 자신'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 내가 찾을 수 있는 나는 어디에도 없다."
니체에게도 주체는 존재합니다. 다만 그것은 나의 본질을 이루는 어떠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이성의 결과물 또는 허구일 뿐입니다. 주체는 통일적이지도 않고, 단일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가변적이며, 다수입니다.
"니체가 대안으로 생각하는 주체, 즉 스스로 자기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율적 주체는 신체성의 원리에 따라 몸으로서 존재하는 신체적 주체이다."
그는 인간의 몸이 주체의 결정체라고 보았습니다. 몸이야말로 "하나의 공동체의 정점을 차지하는 통치자"입니다. 그는 몸의 욕구와 욕망을 긍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강하고,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긍정했습니다. 이러한 삶에 대한 긍정을 그는 'amor fati'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욕망에 노예가 된 인간을 이상적 인간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다스리며 그것을 이루어내는 인간을 '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니체는 본질로서의 주체/자아를 해체하고 실존적 자아, 몸을 가지고 있는 융합체로서의 자아를 대안으로 제안한 것입니다.
푸코는 니체의 전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도 주체는 존재하나 선험적으로 불변하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시간(역사)과 공간 안에서 변형되어 나타나는 주체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iHR4mimY1s
그는 그의 책 <말과 사물>에서 '지식'에 대해서 다룹니다. 플라톤은 지식(앎 episteme)을 고정불변하는 어떠한 원리로 여겼습니다. 플라톤에게 지식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그 기준을 중심으로 무엇이 지식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였습니다. 푸코는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이 그를 둘러싼 고대 그리스 문화의 무의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무엇이 지식인가에 대한 시대의 무의식이 그러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16세기에는 '무엇이 유사한가'를 중심으로 지식을 구성했다면, 17세기에는 표상, 19세기는 주체를 중심으로 지식이 구성되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시간과 공간에 따라 지식을 형성하는 틀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근대의 '주체'도 하나의 지식을 형성하는 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강조점은 '주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시대마다 그 정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라캉 역시 주체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며,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주체의 형성 과정에 관심을 가졌는데요.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상상적 질서와 상징적 질서를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상상적 질서란, 내가 인지한 나입니다.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나로 인지합니다. 하지만 실제의 나는 내가 인지하는 나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상력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바라볼 때 상상력을 발휘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나는 상징적 질서로 편입되면서 깨지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합니다. 상징적 질서는 이미 구축된 허용과 금기의 질서입니다. 청소년이 상상력을 기반으로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다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또는 사회생활을 하면 차가운 세계속에서 평가되는 자신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상상적 질서에서 상징적 질서로 나아간 것입니다. 상징적 질서에서 적응하지 못하면 온전한 주체로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미 구축된 사회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상상적 질서에서 상징적 질서로 넘어가면서 주체는 욕구의 제약을 받습니다. 상징적 질서 안에는 이미 구축된 금기의 질서와 타자의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라캉은 주체의 구성 계기를 욕망에 있다고 봅니다. 주체라는 것은 욕망을 경험하면서 생성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음을 경험하는 것은 나에게 어떠한 욕구,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욕구도 없다면 내가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늘 욕구와 충족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결핍과 의지가 발생하고, 의지로 인해서 내가 여기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라캉의 주체는 타자의 욕망과 관련해서 욕망의 주체로서 존재한다...타자는 나와 맞서 있는 타자뿐만 아니라, 그와의 상호 주관성, 즉 상호 인정, 그리고 금지와 허용을 담고 있는 문화의 규칙, 때로는 무의식과 상징적 질서일 수 있다."
지금까지 근대적 주체/자아를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한 니체, 푸코, 라깡의 이론을 살펴보았습니다.
니체, 푸코, 라깡 모두 선험적 불변의 주체/자아를 거부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니체는 현재의 나로서의 주체, 푸코는 역사성 안에서 변형되거 가는 주체, 라깡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타자와 살아가는 주체를 현대적 자아의 개념으로 내세웠습니다.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본 글의 인용문은 '강영석 교수의 <타자의 얼굴>'을 인용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