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를로 퐁티의 '신체' 개념에 대하여
프랑스 철학자이며, 사르트르와 함께 프랑스 현대 철학의 주요인물입니다. 신체와 지각의 현상학자이자 '살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중적으로 보자면 사르트르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메를로-퐁티에 대한 연구는 기이하게도 프랑스에서보다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먼저 활발히 진행됐으며, 프랑스에서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은 1980년대 말 무렵입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이 활발해지는 시기와 일치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신체와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의 사상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상의 씨앗을 이미 품고 있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그는 주체를 소멸시키고 세계를 해체하기보다는 감각적 세계 안에서 타자와 세계와 공존하는 주체의 윤리학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전통적인 의식 철학을 반대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이성, 감각적인 세계의 로고스를 체현하는 표현적 이성을 새롭게 도입하기 위해서 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요저서로는 <행동의 구조>, <지각의 현상학>, <기호들>, <의미와 무의미>, <눈과 마음> 등이 있습니다.
19세기 서양은 다양한 정치 이념이 각축장이었습니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등의 정치 이념은 다양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며 거대한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이데올로기란, 현실 세계를 바라보는 특정한 생각의 모음, 혹은 관념 체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체계적이고 일관성을 가지고 있어서 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신념체계가 됩니다. 믿음의 체계인 것이죠. 이데올로기는 특별히 어떤 방식이든 '구원'을 약속하며 적극적인 행동을 유발시킵니다.
20세기 대표적인 이데올로기 중 파시즘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러시아 혁명 등)속에서 불안한 대중의 지지를 먹고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무솔리니나 히틀러 모두 자신의 나라를 더 나은 이상향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냈습니다.
이상향
Utopia
인간은 본성적으로 더 나은 세계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현실이 완벽하지 않은데, 우리의 내면에는 이보다 더 나은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떨쳐버릴 수 없는 확신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수 많은 영화, 문학은 유토피아를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더 나은 세계, 더 나은 사랑, 더 나은 관계에 대한 바램이 바로 문학이고 예술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FwI54WWkRw
하지만, 유토피아를 향한 인류의 바램은 종종 실패를 맛 보았습니다.
제가 실패라고 말하니 어떤 분은 반박을 하실 것입니다.
지난 1천년 동안 인류가 일궈온 수 많은 풍요들이 눈에 보이지 않냐고 물어보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인류는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덕분입니다.
자연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 내면의 문제까지 모두 해결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인간은 고독하고, 외로우며, 알 수 없는 갈증에 시다릴고 있습니다.
영화 '노메드랜드', '인투더 와일드'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참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영화입니다.
물질적 풍요의 세계로 부터 벗어날 때 오히려 참 삶의 의미가 보이는 역설적인 상황을 영화로 담았습니다.
파시즘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구원자가 되어 '구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역설했지만,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큰 파멸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기원전 380년 경 플라톤의 저작입니다.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무너져가는 아테네 공동체가 어떻게 재건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사를 가지고 <국가>를 썼습니다.
알려지기로는 <국가>에 언급된 이상적인 국가가 '스파르타'라고 합니다.
모두가 자신에 능력에 받는 일이 주어지고, 그 일을 빈틈없이 수행하고, 수호자와 최고 지도자는 사적소유 포기한 채 오직 국가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공동체가 플라톤의 이상적 국가 공동체입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개인에게 가장 중요힌 미덕은 '절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은 개인에게 주어진 일 이상을 바래서는 안됩니다. 상인은 상인의 일을, 군인은 군인의 일을, 정치인은 정치인의 일을 해야만 합니다. 각 높은 단계의 위치에 올라갈 수도록 더 많은 절제가 필요합니다.
"술 취한 것, 유약한 것, 나태한 것 역시 우리 수호자들에게는 가장 부적절하네."
"올바른 사랑은 성적 즐거움과는 무관해야 하며, 올바르게 사랑하는 연인도, 올바르게 사랑받은 연동도 성적즐거움에 탐닉해서는 안 되네."
"몸이 훌륭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양념 따위는 일절 삼가야 한다는 것쯤은 다른 운동선수도 알고 있겠지?"
"다채로운 음악은 무절제를 낳고, 다채로운 음식은 병을 낳네. 그러나 음악에서 단순함은 혼 안에 절제를 낳고, 체력단련에서 단순함은 건강하게 해주겠지?"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 알 수 있는 사실은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더 나아가 국가가 퇴보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절제'로 인한 '무질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플라톤은 '상대주의'를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절대적 진리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상대화 될 경우 건전한 토론은 사라지고,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권모술수와 파워게임이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 맞는 욕구를 만족시키며, 오직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특히 수호자 계급은 결혼도 금지되었고, 공동생활을 해야 했으며, 자녀들은 별도의 장소에서 교육받고, 약한 아이들은 폐기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생각은 많은 면에서 긍정적입니다.
그는 국가 공동체의 발전이라고 하는 것이 개인의 윤리와 성품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는 옳은 것입니다. 어떠한 사회도 구조와 시스템만으로는 '좋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 있어도 법을 지키는 개인의 윤리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처벌만 강화될 뿐 안정적인 사회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고민스러운 지점은 존재합니다.
사소한 일상의 즐거움까지 통제되어야 하고, 심지어는 공동 결혼과 공동 생활을 해야 하고, 약한자를 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대체 될 수 없는 가치를 대체했기 때문에 오류에 도달했습니다.
절대로 대체될 수 없는 가치는 '한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입니다.
예수는 우리에 있는 99마리의 양보다 길을 잃은 한 영혼을 찾는 것이 더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플라톤은 한 사람의 소중함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국가라고 하는 존재하지 않는 실체로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증후는 그의 인식론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그림자라고 생각했고, 이성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가 참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몸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세계가 정말 그림자일뿐일까요? 몸의 욕구는 그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일까요?
1932년 올더스 헉슬리의 작품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SF 소설입니다. 멋진 신세계는 서기 2496년 미래의 철저한 계급사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득권 층은 4S (Screen, Sport, Sex, Soma)를 가지고 하층민을 철저히 통제하며 안정된 사회를 지향합니다.
세계국가는 '보카노프스키'라는 과정을 통해 철저하게 인구와 계급을 통제합니다. 표준형 남녀, 획일화된 집단을 추구하며 하나의 난자로부터 96명의 쌍둥이를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은 사회의 각 계층으로 구성되어 사회 전체를 위해서 일하게 됩니다. 적도의 뜨거운 여름 속에서 일해야 하는 인간들에게는 따뜻함을 선호하도록 조작하고, 반대의 경우도 그렇게 합니다.
세계국가는 철저히 몸을 통제하고, 몸의 다양성을 이상국가의 목적을 위해서 제거합니다.
완벽한 계획 속에서 철저히 통제된 사회.
이상향이 현실을 통제하는 멋진 신세계는 모든 인간성이 소실되어버린 Brave New World과 아닌 Poor New World 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생생하고, 다소 엉성한 현실을 부정하는 이성중심의 철학이 결국 인간을 소외시키는 현상을 일으켰으며, 생생한 현실 중심, 몸 중심의 철학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Q-u_w9-IWg
메를로 퐁티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사유함' 있다는 의미입니다. 플라톤에게 신체는 제어해야 할 대상이었고, 데카르트에게 신체는 사유를 실행시켜주는 기계였습니다.
메를로-퐁티는 데카르트의 사유방식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데카르트는 인간 그 자체로서 세상을 마주하지 않고, 신체의 일부분?인 정신을 통해서만 세계를 만나려고 했기 때문에 온전한 세계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온전한 주체로서의 신체를 주체의 일부인 정신으로 바라보며 오히려 주체를 소외시켰다고 합니다.
"데카르트와 나눈 대화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체, 즉 '나'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시각'의 문제입니다...데카르트의 주체가 '나는 사유한다'로 정의 된다면 메를로-퐁티의 주체는 '나는 할 수 있다'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는 내 머릿속에서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요. '나는 할 수 있다'는 '나는 잡을 수 있다', '나는 뛸 수 있다', '나는 움직일 수 있다'와 같이 직접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 시각의 문제는 처 번째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시각을 신체의 행동처럼, 나의 두 눈의 운동처럼 이해하는 것은 데카르트적 전통에서 정신의 눈으로 시각을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가 본다고 했을 때 그것은 신체에서 눈이 떨어져 나가서 정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데카르트 정신의 눈은 자신의 신체마저도 바깥 세상의 사물들처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반면 메를로-퐁티는 내 눈은 내 신체에 붙어 있는 상태로 나의 손, 나의 다리를 본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내 신체에 붙어 있는 눈이 내 신체 전부를 볼 수 있냐고 반문합니다. 가령 내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모두 다 만질 수 있는데 나 자신만 만지지 못한다고 생각해보자는 거예요. 이것은 세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이죠. 따라서 퐁티에 따르면 정신의 눈으로는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2)
메를로 퐁티는 우리의 '몸'이 곧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마주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몸이며, 의식은 그 결과물이고, 몸을 통해서 세상을 경험함으로 몸이 주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정신이 포섭할 수 없는 내가 있으며 즉, 내가 생각해서 아는 내가 아니라 나의 행동으로만 알게 되는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3)
칸트(1724-1804)는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한 대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칸트 철학의 위대함은 인간 이성의 이해가능 영역이 어디까지인지를 밝혀낸 것입니다. 대륙의 합리론자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로 세계는 합리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며, 지식은 선험적 이성 안에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세계는 영원한 법칙 아래 존재하며 이성을 가진 인간은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근대 과학에 영향을 주기도, 받기도 한 세계관입니다. 영국의 경험론은 지식은 인간의 경험에 의존하며, 법칙은 경험을 합리적으로 구성하는 인간의 이성(이성의 선험성을 거부함)에 의존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두 사상은 팽팽하게 맞서다, 칸트에 의해서 종합이 됩니다.
칸트는 지식의 출발은 경험이지만, 경험을 종합하는 이성은 선험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식이 재료가 경험이고, 지식을 구성하는 틀은 선험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칸트의 종합은 여전히 이성중심적입니다. 만약 메를로 퐁티가 칸트의 역할을 하여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다면, '몸'을 중심으로 종합하였을 것입니다.
"주지주의는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상황의 중심으로서의 여기가 아닌 절대적인 내부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실제로 지각된 광경 그 자체를 볼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경험주의는 여기에 있는 주체는 허구일 뿐이고 저기에 있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광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고유한 몸의 역할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메를로-퐁티는 합리주의는 오직 인간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문제만을 경험주의는 오직 대상만을 염두해 두었지 정작 내외부의 인식 주체인 인간 자체, 특히 몸 자체의 총체적 작용에 대해서는 간과했다는 비판입니다.
칸트의 종합이 이성중심의 종합이었다면, 메를로-퐁티는 몸을 중심으로 한 총체적 종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오래된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면, 주인공 '샘'은 강도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죽은 후 샘은 영혼이 되어 사랑하는 연인 몰리를 도와주기 위해 그의 주변에 머무르게 됩니다. 샘은 죽은 직후 자신의 신체로부터 빠져나와 죽은 자신의 몸을 바라봅니다.
메를로-퐁티는 몸을 이야기하지 않고, 지식을 말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경험이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볼 수 없죠. 죽은 이후에 영혼이 되어 몸을 빠져 나오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온전히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은 후의 영혼이 세게를 온전히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몸을 통해서 세계를 만날 때 우리는 온전한 세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전통 철학이 마치 인간이 영혼인 것 처럼 지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각은 객관적 사물을 관찰하듯이 지각할 수 없으며, 나의 실존을 통해서 혹은 내가 체험하는 것을 통해서만 알려집니다. 만약 내가 내 몸의 지각을 외적 지각을 대하듯이 대한다면 이것은 내가 나로부터 빠져나와서 내 몸을 바라본다는 것인데..."
우리는 몸을 통해서 세계에 참여하고, 세계와 연결하여 호흡을 주고 받음으로서 온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알 수 없는 나를 타인을 통해서 파악할 때 오히려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나를 파악하기 위해서 노력하다보면 오히려 왜곡된 현실에 갇혀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타인이 지옥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타인과 관계 맺음으로 우리는 온전한 나 자신을 찾아갈 수 있기도 합니다.
"나의 고유한 신체는 감각하느 몸으로서 감각 세계 속에 뿌리를 내린 몸이며 이것을 통해 세계를 향하고, 세계가 나의 몸에 대해 열리기 시작합니다. 메를로-퐁티는 주체와 세계가 유기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요."
이 감각하는 몸을 '현상적 신체'라고 부릅니다. 이는 감각하고 지각하는 몸이 또한 스스로 움직이는 살아 있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존이란 이렇게 현상적 세계, 세계의 나타남을 통해서 나의 감각하고 지각하는 살아 있는 신체를 파악하는 고유한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신체와 세계는 지속을 공유합니다. 그래서 메를로-퐁티는 세계에 대한 최초의 앎은 이러한 나의 신체와 세계의 동시적 탄생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현상적 신체는 하나의 장에서 세계를 만납니다. 나의 신체는 세계 안에 존재하며 실존적 방식으로 바깥 세계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물리적 공간을 넘어 의미의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중립적인 세계가 아닌, 의미의 세계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물리적 공간은 드러나 있지만, 체험의 장으로서의 공간은 언제나 신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깊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재의 세계가 고정된 의미로서 체험되지 않고, 매번 의미를 지닌다는 의미입니다.
플라톤의 국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나치즘, 파시즘, 사회주의, 민족주의... 수 많은 이데올로기들이 늘 간과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플라톤은 국가라는 실체를 너무나 큰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개인의 다양함과 일상을 간과했고, 소설 멋진 신세계는 사회 안정이라는 가치 아래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만들었습니다.
사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일상을 복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토피아가 무엇입니까?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사랑과 헌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이 침해 당할 때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힘을 키우고, 군대를 만들고,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는 순간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싸움을 시작했는지 조차 잊어버린채 폭력에 중독이 되어 다시는 일상으로 회복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통해서 몸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마치 인간이 영혼과 정신만 있는 것 처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영혼만이 구원을 받는 것 처럼 믿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틀린 것입니다. 구원은 총체적인 것입니다. 정신, 영혼, 몸이 모두 구원을 얻어야만 참 구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메를로-퐁티의 몸 철학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우리의 시각을 교정해주는 중요한 철학적 사유입니다.
1) 위키피디아에서 요약본 발췌
2), 3) 정지은, <몸과 살, 그리고 세계의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