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리의 테이블 Sep 30. 2021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 1

근대 주체에 대한 비판 / 강영안 교수님의 책 '타인의 얼굴'을 중심으로

사람의 표정

중국은 미술 시장 규모로 세계 3위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중국 현대 미술의 4대천왕이라고 하면 '왕광이', '쟝샤오강', '쩡판쯔' 그리고 '웨민준'을 꼽습니다. 

소더비 경매에서 55억원에 낙찰된 웨민쥔 1995년작 `처형'

웨민준은 '웃음 시리즈'로 유명합니다. 1962년 중국 지앙성에서 태어난 그는 베이징에 기반을 둔 작가입니다. 천안문 사태에 혐오감을 느낀 그는 90년 베이징의 외곽 예술촌으로 옮겼으며, 그의 웃는 얼굴 그림은 예술가 마을에서 온 보헤미안 친구들의 초상화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웃음 시리즈에는 웃고 있는 남성이 등장합니다. 

2010년 작품 '매장'

그는 자신의 작품 속의 남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작품 속 인물은 모두 바보 같다. 그들은 웃고 있지만 그 웃음 속에는 강요된 듯한 부자유스러움과 어색함이 숨어 있다. 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아무 생각도 없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이들은 곧 내 초상이자 친구의 모습이며 나아가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1989년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천안문 사태의 비극을 지켜본 작가가 1990년대초부터 줄곧 그려온 세상에 대한 냉소입니다. 정치와 종교, 신념의 자유가 거세된 채 획일화된 군중을 강요당하는 중국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한다. 실제 작가 얼굴을 빼닮은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웨민준의 웃는 사람은 그 얼굴을 통해서 중국의 현실을 강력히 비판하며, 말로는 할 수 없는 괴로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케테콜비츠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독일의 여성 작가로서 판화가입니다. 

특별히 그녀는 전쟁 피해자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사실적인 표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에 메세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

그녀의 작품 속 어린이들은 그 얼굴의 표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으며, 외면할 수 없습니다. 


레비나스 (1906-1995)

레비나스는 프랑스의 유대계 철학자이며, 탈무드 주석가로도 알려져있습니다. 그는 독일 신학자 본회퍼의 표현대로 '타인을 위한 존재'로 오신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 우리 모두가 '타인을 위한 존재'임을 증언하는 일을 자신의 철학적 소명으로 살다가 숨졌습니다.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히브리어 성경과 러시아 문학을 읽으면서 자랐고 독일 철학자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정통하였으며 1923년 스트라스부르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1930년 프랑스에 귀화한 뒤 줄곧 프랑스 철학과 함께 숨 쉬고 생각해왔습니다.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  

흔히 레비나스의 철학을 '타자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타자의 철학'이라.. 

왜 그는 '타자'를 사유하는 철학적 작업을 한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 시대에 타자의 철학은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요? 

이전 시대에 어떠한 문제가 있었기에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근대의 시작인 데카르트의 철학을 반성해봐야 합니다. 

데카르트에 대한 반성을 위해 '니체'와 '하이데거'의 근대 비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일 철학은 실로 두 차례나 주체의 절대화를 경험한다. 한 번은 칸트에서 시작하여, 칸트 극복을 기치로 내걸었던 피히테, 셀링, 헤겔의 독일 고전 철학에서였고, 또 한번은 자연주의와 역사주의를 비판하면서 초월론적 주체를 내세운 후설에게서였다. 주체 비판은 이 두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1)  

독일 철학은 하나의 주체로 귀결되는 의식의 중심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칸트에게는 '선험적 자아'가 후설에게는 '초월적 주관'이 의식의 중심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두 철학은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데, 그 뿌리는 바로 '데카르트의 cogito 철학'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유명합니다. 

데카르트는 '사유'라는 것은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사유하는 주체'는 명백하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사유하고 있다는 것이고, 사유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주체'는 명확하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사유가 인간의 핵심적인 행위로 여겨졌으며, 인간은 사유를 통해서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문제는 인간의 사유가 어떠한 한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유라는 것의 명증성이 어느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후에, 프로이트를 통해서 '무의식' 영역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입었습니다. 사유하는 주체의 사유가 사유되지 않는 영역의 욕망에 의해서 지배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사유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니체는 cogito로서의 인간 정의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선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말한 명확한 주체는 무엇입니까? 

일찍이 영국의 경험론자 흄은 자아(주체)라는 것은 감각 경험의 다발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아는 실재가 아니면 그저 경험들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주체는 선험적인 존재가 아니며,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니체는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들어져 첨가된 것, 그 뒤에 숨겨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체란 허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주체라는 것은 언어의 습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잘못은 사유하는 것은 하나의 행위이며 모든 행위에는 행위 주체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사유하는 주체도 존재한다고 믿은 데 있다. 사유 작용이 있을 때 사유 작용을 영위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자체로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사유하는 실체'는 다른 모든 것 아래서 그것들을 뒷받침해주는 기체로서의 주체로 등장한다. 단적으로 말해 니체는 이와 같은 추론은 '문법적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2) 

니체는 '배후에 무언가가 있다'라는 생각은 언어적 차원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판단은 예컨대 '이 방은 덥다고 말할 때처럼 주어와 술어로 결합되어 있다. 방이 덥다면 방을 덥게 하는 원인이 있다는 믿음이 판단에 자리 잡고 있다고 니체는 생각한다. 발생하는 모든 것에는 무엇인가의 주어, 즉 주체가 있다는 생각이 판단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신앙에 따르면 무엇을 탐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주체를, 사건 배후의 활동지를 찾아내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 배후에 있는 '어떤 의도'를 찾아내는 행위를 뜻한다." 


문법적 관습은 니체에 따르면 이미 '논리학적, 형이상학적 요청' 또는 매우 '강한 신앙'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서양 논리학과 형이상학에는 끊임없는 생성 변화를 거듭하는 세계 속에서 이 세계를 떠받쳐주는 실체, 곧 존재하는 것 배후 또는 그 아래서 존재하는 것들을 지탱하는 실체를 요청하고자 하는 욕망이 표현되어 있다. 3)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실체 개념은 주체 개념의 결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우리가 영혼을, '주체'를 포기하면 실체 일반에 대한 전제도 없어진다." 4) 


니체는 서양 형이상학은 거대한 이집트주의로서 생생한 현실을 개념의 박제로 만들어버리는 형이상학이라고 했습니다. 형이상학은 생성을 부인하고, 감각을 부인하며, 역사를 부인하고 신체를 부인합니다. 


니체는 이 세계는 어떠한 이면과 본질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생동하는 것 자체일 뿐이고, 힘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유도 생각 그 자체이지 그것을 사유하는 어떠한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물리적 법칙도 법칙을 가진 세계가 전부이지, 법칙과 세계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세계가 사라지면 동시에 법칙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유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인간이 죽으면 사유도 정지하는 것일 뿐 정신만 남아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과연 데카르트의 주체를 극복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의 'cogito'가 주체와 대상으로서의 위계적 자리매김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내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의 사유로부터 나의 존재가 추론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나는 대상을 '앞에 세우는 자'로서 대상을 닦달하고 문초하는 자로서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들은 나에게 표상되고 문초 받는 대상으로서 그 존재 의미를 가짐을 말해준다. 이렇게 보면 존재자에 관한 진리는 앞에 세우고 닦달하는 자가 스스로 설정한 확실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밖에 얻을 수 없다." 5) 


하이데거는 데카르트가 '나'의 사유와 존재 본질을 '앞에 세움', '닦달함', '문초함'으로 이해한 것은 물질 세계를 '앞에 세워 닦달하는 대상'으로 이해하는 기초가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데카르트의 자아는 이성을 통해 확실성을 확보한 자아이며, 이성은 세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로서 이성을 통해서 모든 것들은 판단을 받아야만 된다고 여겼습니다. 


"세계는 관조의 대상이나 신의 피조물, 또는 나를 에워싼 환경 세계가 아니라 내가 세우고 짜 맞추고 필요할 때는 언제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물의 의미는 인간에게 표상되고 짜 맞춰지는 가운데, 다시 말해 대상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비로소 확인될 수 있다." 6) 


현대 철학자들은 근대적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내어 생생한 현실을 왜곡했다거나, 주체가 대상보다 먼저 존재하며 세계를 구성하는 권력을 누리어 폭력적인 세계질서를 만들어 냈다고 비판했습니다.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철학자들이 이제는 죽었다고 말하는 주체는, 절대 기원의 신화를 만들어 낸 주체, 현실을 완전히 독점하고 지배하는 주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어느 철학자도 'Cogito'를 절대적 주체로서 끝까지 밀고나간 철학자가 없습니다. 데카르트 마저도 Cogito의 명증성을 신과의 연결에서 찾고 있으며, 칸트는 순수이성의 영역에서만 Cogito의 주체성을 인정할 뿐입니다. 피히테도 절대성의 근거를 신에게서 찾고, 헤겔은 '절대정신'에서 정신사의 절대적 토대를 마련합니다. 


그럼으로 현대철학자들의 주체에 대한 해체 작업이 '절대화된 인간의 자아'를 넘어, 절대성 자체의 토대에 도달할 때 이는 마치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근대적 주체 비판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니체가 '추체는 허구'라고 말하면서도 다수성으로서의 주체, 몸의 주체를 또다시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음 글로 이동


이 글의 인용문들은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을 인용한것입니다. 

이전 27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의 본질 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