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공적 논의의 장을 기대하며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 작업, 행위'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인간은 정해진 조건 하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처럼 여겨지는 말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에 대해서 중요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미 어떠한 한계를 가지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한계 조건은 무엇일까요?
하나 아렌트는 '삶', '세계성', '다원성'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세계' 속에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야만 하며, 나와 같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두고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노동, 작업, 행위'로 설명하였습니다.
1) 노동(Labor): 인간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심장이 박동합니다. 심장의 박동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심장을 멈추게 할 수는 있지만, 정상적인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만으로 심장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인 인간의 조건 중에 하나인 '생존'입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살아가야만 합니다. 심장이 뛰기 때문에 되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을 해야만 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생존을 위한 모든 움직임을 '노동'이라고 부릅니다. 농사, 수렵, 가사 노동 등 생존과 직결되는 일을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면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높은 차원이란 자신의 생존을 넘어서는 선행과 연대, 문화와 예술을 이루는 삶의 양식을 말합니다.
한나 아렌트가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그들의 사회가 '노동'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는 노예제가 존재했던 사회였습니다. 전쟁 포로들이 노예로서 '시민 계급'을 위해 노동을 수행했습니다.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민들은 더 높은 차원의 영역에 힘을 기울일 수 있었고, 이러한 환경이 그리스의 민주정치를 발달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2) 작업(Work): 생존의 문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인간은 예술적이며, 생산적인 물건을 만드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주거 공간 및 그에 부속하는 물품 혹은 의복 등과 같이, 인간적 삶에 필요하지만 생명 유지를 위한 긴급성을 요구하지는 않는 일을 말합니다. 근대 사회가 최고로 추구한 것이 '작업' 입니다. 이는 효용성과 공리적 원리에 지배를 받았습니다.
근대 사회는 작업의 결과물을 향해 '쓸모가 있는지' 여부를 질문했습니다.
근대 자본주의는 수많은 물건들을 만들어 내고 소비합니다. 상품은 점점 더 세분화된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인간의 욕구를 자극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이런 물건들이 다 필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필요 이상의 물건을 만들고 소비하는데 모든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물건에 대한 이야기 뿐입니다. 자동차, 컴퓨터, 스마트폰, 가방, 옷, 커피 등.
저는 이러한 지식들이나 관심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친구가 '튀니지'에 있습니다. 평소에 커피에 대한 조예가 깊은 친구입니다. 튀니지에서 생활하신 6개월 후 그 친구가 발견한 것은 튀니지 사람들이 좋은 원두를 가지고 나쁜 커피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원두를 로스팅하고, 커피를 내리는 모든 과정이 소위 선진화 되지 못한 것입니다.
"튀니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커피를 마시게 하자"
친구는 자신의 커피 지식을 적용해서 더 나은 문화를 창출하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제가 이 친구를 칭찬하는 것은 물건에 대한 단순한 관심으로부터 공공의 이익으로 그 관심사가 옮겨졌다는 점 때문입니다.
특정 물건에 대한 관심은 아주 유익한 것입니다.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서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무를 때 사회는 정체되거나 퇴보할 수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노동과 작업에 매몰된 근대인은 '행위'를 상실했다고 말합니다. 노동과 작업은 사적인 활동입니다. 철저히 '나와 자연' 사이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행위만으로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생각이며 제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3) 행위(Action): 인간은 실존적 존재입니다.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결정을 합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또한 상호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다양성이 질서 안에서 조화되지 못하는 사회는 붕괴되고, 혼란이 야기 됩니다. 그렇다고 다양성을 획일화 시키는 것은 인간의 존엄함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러한 지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행위' 개념이 언급될 수 있습니다.
행위라는 말은 '정치적 행위'로 고쳐 말하여도 무방합니다.
"행위는 인간의 다원성으로 인해 요구되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욕구는 때로 상충합니다. 이러한 충돌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소통을 해야 합니다. 이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유일한 활동입니다." 1)
한나 아렌트는 노동, 작업, 행위의 조건 하에 존재하는 인간이 근대를 거치며 노동과 작업을 중시(자본주의)한 나머지 '행위'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먹고사는 개인적인 문제가 행위의 공론의 장을 차지하여 전체주의와 같은 폭력적이며 비정상적인 통치형태가 허용되었다고 진단한 것입니다.
아래 표는 유창선 교수가 정리한 표인데, 시대별로 어떠한 조건이 우선 순위가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요?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에 60~70년대 '노동'의 시간을 보냈고, 80년대 이후에 눈부신 '작업'의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반면 '행위'의 영역인 정치는 어떻습니까? 민주주의 측면에서 보면 독재를 종식시켰고, 비폭력 혁명을 통해서 정권을 교체하면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정치적 행위의 중심에는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기 보다는 '경제적 이익'이 가장 큰 동기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촛불혁명의 경우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습니다) 경제적 이익 또는 경제 성장은 중요한 정책적 과제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요? 경제 성장을 가장 중요한 정책적 과제로 삼는 사회는 한나 아렌트 식으로 보면 여전히 노동과 작업의 단계로 머물러 있는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시대의 광기를 경험한 한나 아렌트는 광기의 배경에 '행위'의 상실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녀는 시대의 정신을 깨워줄 공공의 광장이 필요하며, 이 광장에서의 열린 토론이 건강한 견제 장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60년에 아렌트는 연구를 위해 여행을 떠나려다 긴급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칼 아돌프 아이히만이란 사람이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체포 당해서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을 죽인 원흉은 히틀러이고 히틀러 직속으로서 소위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총 책임자는 힘러Heinrich Himmler 라는 사람입니다. 힘러 밑에서 지시 받은 사안을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해결한 사람이 아이히만입니다. 해결한 문제가 유대인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렌트는 재판이 열리는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아렌트는 인류 최악의 범죄라고 일컬어지는 홀로코스트 사건을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가 너무 평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피에 굶주린 악마도 아니었고 이념에 미친 광신자도 아닌 너무나 평범한 중년 남자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재판 과정에서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아렌트는 그를 지켜보면서 ‘악의 평범성’을 떠올렸다. 악은 특별한 것이나 심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2)
https://www.youtube.com/watch?v=9JW8ijjz9sU
아이히만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문제에 관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가 전쟁이 끝날 무렵 휘하의 사람들에게 "나는 내 무덤에 웃으며 뛰어들 것이다. 500만 명의 유대인의 죽음에 내 양심이 거리낀다는 사실이 나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은 완전히 허풍이었다. 그는 무덤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가 무엇인가 양심에 걸렸다면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 나중에 그가 좋아하게 된 유대인 가운데 한 명인 빈의 유대인 공동체의 수장 요제프 뢰벤헤르츠 박사의 따귀를 때린 점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히만의 삶을 살펴보면 그가 조직 내에서의 성공을 얼마나 열망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그저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의 일이 무엇과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해야할 일은 명령을 따르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유태인에게 어떠한 악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루 하루 자신의 일에 충실한 공무원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매일의 평범한 일상이 거대한 악으로 연결되는 놀라운 '악의 평범성'입니다.
저는 아렌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약 아이히만이 진정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많은 문제가 야기 됩니다. 자는 아이히만이 양심의 소리를 다른 방식으로 무마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불한당>에서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죄의식이 꼭 나쁜 것 만은 아닌가봐. 죄의식이라는게 작업방식을 많이 발전시켰어...석기 시대에는 돌로, 청동기 철기 시대에는 칼로, 요즘은 총으로 사람을 죽이잖아. 총이라는 게 죄의식을 덜어줘. 어느정도 거리가 있다보니까."
독일 나치는 본질적으로 유태인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하나의 프로세스로 만들어 죄책감을 경감시키고, 그 시스템 속에서 일할 때는 그저 평범한 일인 것 처럼 느끼게 하는 여러 장치를 만들어 냈습니다.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자들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조직의 목적을 위해서'라거나 '더 큰 대의를 위해서'라는 식으로 무시하면 현실을 왜곡했습니다.
"악의 평범성은 사유의 불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동시에, 남의 입장에 서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아이히만의 문제는 무사유로 정리가 됩니다. 사유 혹은 생각이란 계산이나 인지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산 능력이라면 아이히만도 탁월했죠. 여러 일들을 잘 처리했거든요. 그런 처리 능력이나 인지 능력, 혹은 계산 능력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정신 능력이 사유입니다. 이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묻는 능력과 직결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묻지 못했던 아이히만의 모습. 이 모습은 오늘날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악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3)
우리는 하나 아렌트의 '행위' 개념을 통해서 잉여 인간을 만들어 낸 사회가 어떻게 전체주의를 탄생시키며, 전체주의라는 악의 구조 안에서의 평범함이 '악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악랄한 사건을 만들어 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우리는 어떻게 정의롭게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 글을 시작했는데요.
우리가 하려는 어떤 일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일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그 일이 타인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를 '사유'하며 용기를 갖고 '행위'하는 존재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 유창선, 인간의 조건 강의
2)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경향신문
3) 김선욱,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를 넘어 정치의 길을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