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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Nov 16. 2021

선생님! 착하게 살면 뭐가 좋습니까?

중학생에게 플라톤의 국가 가르치기

27살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초등학교 때 강원도에서 온 한 친구와 다툼이 있었습니다. 점심때 밥을 먹다가 싸웠는데, 이유는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툼이 종결되고, 다들 흩어졌는데 자책이 되더라고요. 

"처음 전학 온 친구를 잘 대해주지는 못할망정, 괴롭게 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적절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에 그 친구를 찾아가 먼저 사과를 했습니다. 

나름대로 착하게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았고, 그런 삶이 저에게도 유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제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혼란이 생겼습니다. 

27살에 유통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못 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제가 다소 '온정주의 1) 적 입장'을 좋은 태도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거나, 배려하는 사람보다 관계에서 냉정하고, 자기 것을 쟁취하려는 거친 사람들이 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직장을 다니던 시절에 GE의 회장이였던 '잭 웰치'라는 사람에 관련된 책을 많이 보았는데요. 

잭 웰치

그가 GE라는 회사를 혁신시키고, 지속 발전하도록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게 말해서 그가 '무자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1등이 아니면 사업을 정리하고, 그 사업과 관련한 무수히 많은 사람을 해고시키며, 철저히 회사의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건데요. 이러한 비즈니스 현실이 이해가 되면서도, 내가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늘 고민했던 것이 "정말 상생하는 비즈니스는 불가능한 것인가?"였습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이와 관련된 논의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는 '정의'에 관한 논쟁을 벌이는데요.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행하는 것이 옳고, 좋다고 말하며,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를 행하는 것은 옳을 수는 있지만 좋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물론 트라쉬마코스가 정의를 행하는 것이 '옳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정의 자체가 '유익'한 경험의 집합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정의는 애초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신들에게 이익이되는 무엇인가를 '정의'라고 명명했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와는 반대 입장이죠. '정의'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익과는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정의의 유용성'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한테 이익이 없더라도 정의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고, 

트라쉬마코스는 

"나한테 이익이 없는 정의가 무슨 쓸모가 있냐?"는 입장입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 겪었던 혼란이었습니다. 소위 '못된 사람'들이 더 성공하는 것 같은데, 굳이 다른 사람 배려하면서 착하게 살 이유가 뭐가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글라우콘은 결국 이런 주장을 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보다, 정의를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놓고 못된 놈은 사회에서 퇴출되니, 적당히 착하게 살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라고 본 것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니, 각종 선거철만 되면 각종 비리 의혹이 터지는 것이겠죠. 

보는 눈이 적던 '사인 2)'시절에는 적당히 나쁜 짓을 하며 살던 사람이 공직에 나서려니 보는 눈이 많아지고, 옛날에는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이 작은 죄가 이제는 문제가 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아이들도 질문합니다. 

"선생님, 착하게 살면 뭐가 좋은 건가요?"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이 좋은 삶이다? 

20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유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맹자는 인간을 본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선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선한 양심이 네 가지 형태(사단)로 발현된다고 보았는데요. 

맹자

측은지심(惻隱之心) - 남의 불행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수오지심(羞惡之心) -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사양지심(辭讓之心) -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이다.

시비지심(是非之心) -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맹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선한 마음이 있으며, 선한 마음을 따라 사는 삶이 옳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양심이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마치 손과 발이 각각의 역할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손은 손의 일을 하고, 발은 발의 일을 해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과 행동도 타고난 양심을 따라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중세 철학의 종합자로 일컬어지는 대철학자입니다.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에서 태어난 그는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였으며, 자연신학의 선구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양심과 도덕적 의식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라틴어 'synderesis'와 'conscientia'라는 단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conscientia를 '양심'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럴게 할 경우 synderesis 와의 차이를 구분해내는데 혼란을 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논문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synderesis와 conscientia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synderesis는 모든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도덕 판단의 제일원리로써 단순히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뿐 아니라, 선천적으로 '선'을 지향하고 나아가 선을 행하도록 부추기는 내적인 힘처럼 고려되고 있습니다. 


반면


conscientia는 'synderesis'의 빛을 수용하여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이를 적용하는 기능을 하는 것인데, 이러한 적용의 과정에서 도덕적인 것과 무관한 추론의 능력, 반드시 알아야 할 법적인 지식들 이외 여타 학문적인 결과들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한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한 '종합적 판단의 능력'처럼 고려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데요. 

synderesis: 양심 

conscientia: 도덕적 의식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에 따르면 양심을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착한 게 살고자 하는 마음' 

두 번째는 '무엇인 옳은 것인지를 판단하려는 능력'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을 맹자의 관점에서 보면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은 synderesis에 해당하고, 마지막 시비지심은 conscientia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칸트(1724-1804)는 양심과 관련해서 '정언 명령'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칸트

'정언'이란, 이미 정해진 말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정언 명령이란, 인간의 생각으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지만,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명령입니다. 

그는 "자기 행위의 원칙이 보편 법칙에 일치하도록 행위하라"라고 했습니다. 


칸트는 인간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떠한 존재로부터 도덕적 명령을 받고 있으며, 그러한 도덕적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양심적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행위의 원칙이 보편 법칙에 일치하도록 하라는 말도 보편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이것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보편 법칙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내용이 있지만,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요. 다만, 모든 사람이 윤리적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만 보편 법칙이라는 것도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점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양심이라는 것도 다 조작된 거야!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 따르면 '도덕 체계'는 문화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으며, 모두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synderesis'와 'conscientia' 개념으로 니체의 의견을 분석해보면, 니체가 말한 '도덕'은 conscientia에 해당하는 도덕적 의식입니다. 

즉, '도덕적 의식'은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성경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신 11:18-21, 새번역]

18 그러므로 당신들은, 내가 한 이 말을 마음에 간직하고, 골수에 새겨두고, 또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19 또 이 말을 당신들 자녀에게 가르치며, 당신들이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20 당신들의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

21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들 조상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당신들과 당신들 자손이 오래오래 살 것입니다. 당신들은 하늘과 땅이 없어질 때까지 길이길이 삶을 누릴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이집트로부터 구원받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약 '도덕적 의식'이 고정 불편하는 것이라면, 옳은 것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도덕적 의식이 유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가르치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맹자가 말한 시비지심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synderesis, 칸트의 실천이성이 없다면 어떻게 옳고 그름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이는 마치 컴퓨터의 작동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데, 코딩과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코딩과 프로그램은 컴퓨터의 작동 원리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류에게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이 없다면, 인간이 선하게 살고 싶은 의지가 없다면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양심'과 '도덕 법칙'이 인간 문화의 결과물이고, 조작될 수 있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도덕적 의식'은 그럴 수 있지만, '양심'은 그럴 수 없습니다. 

잘못된 도덕적 의식은 언제나 양심에 의해서 그 방향을 조정받습니다. 

어떤 순간에 잘못된 길을 갈 수도 있지만, 그 한도를 넘어서면 양심이 방향을 잡아줍니다. 

우리가 걸어온 역사가 그 증거입니다. 

인간은 강해지고 싶고, 강한 힘을 바탕으로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그러한 힘을 견제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착하게 살면 뭐가 좋습니까? 

"얘들아, 지금 우리에게는 남의눈을 피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 전체를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은 그러한 악한 사람들을 절대로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이것을 일반적으로는 '역사가 심판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잠깐의 쾌락을 위해서 가치 있는 삶을 버리는 것이 더 좋으냐? 아니면 우리에게 요청되는 정의를 따라 살며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좋으냐? 무엇이 너에게 더 좋은지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제자들아 선하게 사는 삶이 옳은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1)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게 대하려는 생각이나 태도

2) 공직에 나서기 전의 평범한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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