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커피를 참 잘 내린다. 맛있다고 소문난 카페의 커피보다 몇 배는 맛이 좋다. 향긋하게 퍼지는 향에 코가 한번 즐겁고 그 느낌 그대로 한 모금 마시면 이번엔 입 안이 축제라도 열린 듯 고소한 맛으로 가득 찬다. 신기하게도 목으로 바로 넘기기 딱 적당한 온도의 커피는 기분 좋은 따뜻함을 온몸에 전하며 흘러들어 간다.
"이거 커피 이름이 뭐래?"
"이르가체페"
그녀의 예가체프 발음은 독특하다. 처음 들었을 때에는 알아듣지 못하고 몇 번을 되물었다. '이르가처페', '이르가체페' 비슷한 발음이다. 원두가 나오는 에티오피아에서는 그렇게 발음한다나. 영어도 아니고 암하릭어인가 하는 에티오피아 공용어라는데 굳이 쓰는 이유를 모르겠다.
"매번 하는 말이지만 커피 정말 맛있다. 내가 신맛 나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건 향에 속아서 꼭 한 입 마시게 된단 말이지. 신기하게 마시고 나면 달큼하고 고소한 고구마 같은 맛이 나서 자꾸만 생각이 나. 그러다 보면 한잔 비우는 거 순식간이고. 참 신기해."
그녀는 언제나 말이 짧다. 밥을 먹었는지 물어봐도 하루종일 무얼 하고 지냈느냐 물어봐도 항상 단답형이다. 집중하느라 이쪽을 보지 않고 이야기하던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발그레한 볼에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하고는 들어본 적 있는 듯 익숙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새콤한 맛 뒤에 올라오는 달큼하고 고소한 맛이 자꾸만 생각나서 한 모금, 두 모금 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가보지도 않은 에티오피아가 어떤 나라일까 궁금해하며 잠시 멍 해 있다가 문득 그녀는 왜 항상 같은 커피만 마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그닥 소리가 나며 꽃그림이 화려하게 그려진 접시가 놓였다. 오렌지색이 드문드문 보이는 노란색의 폭신해 보이는 케이크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케이크 옆에 무성의하게 놓인듯한 포크 끝에 붙어 있는 빨간 장미에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왜 맨날..."
"오늘은 오렌지를 넣은 케이크를 구워봤어."
하려던 말이 맥없이 잘려나갔지만 그녀의 맛있는 케이크 맛을 아는 입속이 요동을 쳐서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손은 이미 포크를 집어 케이크를 먹기 좋게 자르고 입으로 나르는 중이었다. 입안에 고인 침을 처리하느라 나도 모르게 '꿀꺽' 하는 소리가 났다. 금방 내린 커피잔에서 올라오는 허연 김의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침묵 속이라 마치 천둥이라도 내려친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부끄러움에 자리를 피하려 안절부절못했을 터이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동안은 세상 편하다. 이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덕분에 멀쩡한 집을 놔두고 이곳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우리 집은 '집'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 따뜻하고 편안하고 나가 있으면 줄곧 생각나는 것이 집이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사는 곳은 바람을 피해 잠을 자기 위한 '공간' 쯤이다.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는 방에 매트리스가 섬처럼 떠 다닌다. 한쪽 구석에는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키친이 있다. 하지만 늘 근처 편의점에서 사다 먹고 던져 놓은 비닐봉지가 굴러다녀 때로는 원하지 않는 부스럭 음악이 나오는 뮤직박스가 되었다. 매트리스 위에서 치워진 적이 없는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워있자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부터 시작해서 '왜 이렇게 된 거지'를 거쳐 '왜 살지'까지.
남들 다 가는 학교를 당연하다는 듯이 다녔다. 옆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고 따라다니며 뒷바라지해준 부모님 덕에 이팔청춘은 책과 연애하느라 하늘 한번 올려다볼 여유가 없었다. 다행히 머리는 나쁘지 않았는지 주변에서 제멋대로 정해서 가라고 가라고 귀가 닳도록 이야기하던 대학에 붙었다. 부모님은 동네방네 아들 자랑하러 다니느라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최소한의 반항으로 현장에서 일하기를 거부하고 연구원이 되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최소한으로 하고 내 일에 골몰할 수 있는 것이 적성에도 맞는다고 생각했다.
일은 예상대로 재미가 없었다. 다행히 주어진 것에 대한 책임감은 있어서 연구주제가 나오면 성과가 나오긴 했다. 덕분에 다 썩어가는 고등어 같은 눈빛을 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누구 한 사람 말 거는 사람도 없었다. 나의 꽃 같은 20대는 이팔청춘을 함께 불태웠던 책 대신 컴퓨터와 함께 지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연구실로 들어가던 어느 아침의 일이다. 점심에 먹을 샌드위치를 사 오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버릇처럼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을 감고 뱃속 어딘가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김을 뱉어내려고 입을 살짝 벌린 순간이었다.
"달걀 샌드위치 받아요."
깜짝 놀라 번쩍 뜬 눈앞 광경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컬러풀한 색으로 가득했다. 그곳에 웃음기를 머금은 그녀가 있었다. 얼떨결에 코 앞까지 내밀어진 샌드위치를 받아 들고 나만의 연구실로 들어가 앉았다. 달걀 샌드위치라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침부터 행운 같은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달라드는 허기에 허겁지겁 들고 있던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고 입으로 가져가 한 입 배어물었다. 무슨 달걀을 쓴 건지 노른자가 샛노랗다 못해 오렌지빛을 띠고 있었다. 원래부터 아침을 먹지 않는 터라 샌드위치를 물고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짭조름한 맛과 함께 입안 가득 느껴지는 고소함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것이었다. 씹을수록 느껴지는 단맛은 또 어떤가. 감탄하느라 쉴 새 없이 샌드위치를 입 속에 쑤셔 넣는 사이 은은한 꽃향기가 콧 속을 파고들었다.
'응?'
고개를 돌린 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달그닥 소리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거기에는 금방 내린 듯 뜨거운 김이 솔솔 올라오는 새카만 커피가 있었다. 처음 보는 화려한 잔이었다.
'회사에 이런 컵도 있었나?'
"이르가체페"
이..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입안 가득 물고 우물거리는 탓에 들리질 않은 거겠지. 맛있냐고 물어본 건가 싶어서 대충 맛있다고 둘러대며 커피를 한 모금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이건 또 얼마나 맛있는지. 달콤 짭조름한 샌드위치와도 은근 잘 어울렸다. 살짝 쏘는 신맛이 계란으로 텁텁해진 입안을 가볍게 씻어내려 줬다. 깔끔해진 뒤에 느껴지는 달큼하고 고소한 맛이 자꾸만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침 먹는 인간이 되었다. 매일 아침 부탁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나에게 샌드위치와 커피를 건넸다. 우리는 처음 뵙겠습니다 같은 식상한 인사는 나누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꽤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점심을 먹으러 함께 나가기도 하고 회사를 쉬고 동해로 드라이브를 떠나기도 했다. 나는 원래 시답지 않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싫어하는데 그녀와 함께 하는 동안에는 가만히 있어도 뭐라고 하지 않아 좋았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사이. 그녀와 내가 바로 그런 사이였다. 나는 어느새 그녀와 떨어지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덕분에 우리는 반 동거를 시작했다.
처음엔 가끔 내가 일이 끝난 후 그녀의 집으로 가는 식이었다. 계절이 다 가기도 전에 나는 그녀의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이제는 내가 살던 그곳을 어떻게 처분할지 생각하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녀의 말은 짧았다. 그럼에도 행복했다. 내가 뭘 하든 지켜봐 주는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그녀는 짧았던 말이 더 없어지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지 신경이 쓰여 자꾸만 얼굴을 살펴보게 되었다. 그녀도 내 걱정되는 눈빛이 신경이 쓰였는지 며칠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집이 어디냐고 데려다준다고 하는 나의 말에는 그럴 필요 없다며 웃어 보였다.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하다가 혼자가 되니 허전함에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버릇처럼 연구소로 출근을 해서 점심에 먹을 샌드위치를 담은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들어갈 때였다.
"오늘은 혼자인가 봐요? 그 옆에 달고 다니던 최신식 로보.. 아 왜?"
늘 껄렁껄렁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찝쩍대는 이 씨가 말을 걸어왔다. 웬일이야 싶은 눈을 하고 듣는데 옆에 있던 최 씨가 이 씨의 옆구리를 황급히 찔러댄다.
'최신식 로보?'
그게 뭔지 생각하기도 전에 최 씨의 손에 이끌려 이 씨가 내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던 나는 문득 전화기를 꺼내 무언가에 홀린 듯 버튼을 눌렀다. 잠시 신호가 가더니 낯익은, 그러나 언제 들어도 소름이 돋는 목소리가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댔다.
"어머, 웬일이니 네가 전화를 다 하고. 아, H20 어떻게 됐나 궁금했구나? 다 고쳤어. 에러가 좀 있어서 애가 이상했나 보더라고. 그래서 잘 지내? 집에 한번 와..."
총천연색으로 반짝이던 눈앞에 세상이 급격하게 색을 잃었다. 갑자기 알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의 자라지 않는 머리카락. 움직일 때마다 낮게 웅웅 거리던 소리들. 내 앞에서 한 번도 뭔가를 입에 넣은 적이 없던 그녀. 내가 그녀의 이름을 여전히 알지 못한 다는 사실. 갑자기 귓가를 울리는 그녀의 콧노래. 늘 한 귀로 흘렸던 그 노래는 부모님의 꼭두각시 같았던 시절 엄마가 늘 들려줬던 그것이었다.
"집중 잘 되고 기분 좋아지는 곡이야. 들어봐"
저주 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올라 부르르 몸이 떨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집은 언젠가 가출하려다 걸려 엄마에게 된통 얻어맞고 방에 갇혀 있을 때 아빠가 몰래 도망가서 살라며 사준 곳이었다. 나를 지켜줄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내가 그녀에게 초대를 받아서 그 집에 들어오게 되었던가? 아니다. 처음부터 내 손에 열쇠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떨리는 몸이 진정되지 않아 손 끝이 하얘지도록 양팔을 꽉 눌렀다. 전화가 오는지 책상 위에 던져 놓은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렸다. 무심히 내려다본 화면엔 'hell'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책상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끄트머리에 불안하게 올려져 있던 편의점의 비닐봉지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바닥에 발이 닿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자꾸만 휘청거렸다. 사회에 나와 돈을 벌게 되고 독립을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나 답답할 때 변화무쌍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좋아졌다. 발이 저절로 옥상으로 향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기듯이 올라가 도착한 옥상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다. 시원한 바람이 정신없는 머릿속을 날려주길 바라며 심호흡을 했다. 한번... 두 번...
어디서 많이 맡아본 향긋한 냄새가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손에는 언제 내렸는지 김이 폴폴 올라오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반대쪽 손에는 커피만큼 새까만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생크림 케이크가 참 맛있어 보여서 사 왔어."
언제나 짧게 말하던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생크림 케이크라면서 무슨 크림이 저렇게 까만 건가 하는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얗고 까만 새들이 줄지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든 하늘은 방금 전까지 새파랬는데 어느새 우중충한 회색이 되었다. 웃음이 나왔다. 이제 그녀와 함께 있어도 세상은 컬러풀하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 나르는 저 새들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면 새 파란 하늘이 반겨주지 않을까'
버릇처럼 그녀가 주는 커피를 참을 수 없는 향에 매혹되어 한 모금 입에 흘려 넣으며 생각했다.
"케이크는 됐어. 포크가 없어서 못 먹겠네. 그런데 너 이름이 뭐야?"
"H20. 물 같은 존재가 되라며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야. 맘에 들어?"
"이름 센스 봐라. 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참 끝까지 물 먹이시네 이분."
내가 뭐 좋은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는 입꼬리를 올리고 콧노래를 흥얼대기 시작했다. 자꾸만 눈에 물이 고여 앞이 뿌예졌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하늘은 언뜻언뜻 새파란 빛을 보여주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연구실에서 입는 백의를 가볍게 훑고 지나가서 펄럭였다. 이 정도면 훌륭한 날개가 되어줄 것 같았다. 나는 달렸다. 처음엔 휘청거리느라 넘어질 것처럼 고꾸라지더니 점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땅을 박차는 소리가 요란하게 귓속을 울렸다. 부들거리던 몸이 떨림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이야!'
바람이 등 뒤에서 세게 나를 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힘차게 구르던 두 발을 아무것도 없는 공중으로 내디뎠다. 일순간 중력에서 벗어난 몸은 깃털만큼 가벼웠다. 여전히 뿌연 눈에 이제껏 본 적 없는 색으로 반짝이는 세상이 보였다.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게 행복이지."
그리고 어둠.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먼 곳에서 콧노래가 들려온다. 눈앞에 따뜻한 빛이 비치고 있는 듯해서 눈동자를 움직여본다. 이번에는 손가락, 다음에는 발가락도. 미미하지만 꿈지럭거리는 몸뚱이가 느껴졌다.
'사후세계라는 건가?'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에 있는 대로 힘을 줘 본다. 천천히 열리는 시야로 익숙한 꽃무늬 벽지가 들어온다. 콧속을 파고드는 향이 마른 목에 그것을 흘려 넣으라고 부추긴다. '커피'. 갑자기 떠오른 단어에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키려 해 본다.
"잘 잤어?"
기분이 좋은지 발그레한 볼을 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버릇처럼 입술을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