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울리는 알람이 귓속을 찌르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한 번에 팔을 내리쳐 알람을 끄려고 했다. 목표물을 겨냥하고 높디높은 곳에서 한방에 채어 가는 매처럼 날렵한 손놀림으로.
'?'
팔이 돌덩이처럼 무겁다. 팔이 제대로 달려있는지 확인하려고 엎어진 채 오른쪽으로 돌려진 고개를 밑으로 향하려 했다. 이번에는 고개가 움직이지 않는다. 눈동자만 겨우 움직여 아래를 보았다. 눈동자를 따라 슬그머니 돌던 방 안 풍경이 멈추지 않고 계속 빙글빙글 떠 다닌다.
'비라도 오는 모양이네.'
움직이려고 온몸에 힘을 주던 것을 포기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런 날은 잠이 안 와서 눈이 알아서 말똥거릴 때까지 누워서 자고 싶어 진다. 하필이면 오늘은 거래처에 일이 있는 날이었다. 얼마 전에 디자이너에게서 받아온 샘플을 가지고 가서 어떤 옷감으로 만들 것인지 최종확인을 하는 날이었다. 거래처 사장이 어찌나 깐깐하게 구는지 약속 날짜나 시간을 조금이라도 바꾸거나 하면 역정이 장난 아니다. 그래도 그만큼 끝내주는 옷을 만들어내는 제작소도 또 없긴 하지만...
"어디 숨어 있는 고수가 하는 제작소라도 찾아봐야겠어."
혀를 끌끌 차며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이래서 난 장마철이 치가 떨리게 싫다. 하루가 멀다 하고 두통과 어지러움이 찾아온다. 날씨를 살펴보면 어김없이 '저기압'이다. 날씨는 어떻게 배신이라는 걸 안 하는지. 앱을 켜서 미리 확인하고 제발 바뀌라고 여러 번 바래봤지만 언제나 어김없이 딱 들어맞았다. 고층이라 누가 들여다볼 걱정이 없는 덕에 늘 속 커튼만 남기고 활짝 열어 놓는다. 햇볕을 못 받아서 한이라도 맺힌 사람처럼 찌는 듯 더운 날도 태양볕 밑에 앉길 좋아한다. 전생에 광합성을 못하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광합성 못하고 죽은 귀신에 생각이 미치자 어이없는 웃음이 찡그려 열린 입 사이로 새어 나왔다. 분명 오늘도 속 커튼만 남기고 열려 있을 텐데 사방이 어둡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내 몸은 대변하듯 축 늘어진 시곗바늘이 7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꿈지럭대는 사이 시간이 껑충 가버렸다. 잘 봐 달라고 뭐라도 사가지고 가려면 늦어도 8시에는 나가야 했다.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머리만 굴려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천장이 밑으로 가면서 몸이 쑤욱 아래로 꺼지는 듯한 느낌이 났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려고 벌린 입 속 깊은 곳에서 울컥 시큼한 것이 올라왔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꿰매 만든 애지중지하는 이불이 잘못될라 재빨리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었다.
주저앉아 변기를 부여잡고 고개를 처박았다. 꿱엑 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이 꼭 남의 것 같았다. 밖에서 내리는 비가 어디 파이프에 부딪혀 떨어지기라도 하는지 통통 대는 소리가 박자를 맞추려는 듯 들려왔다.
'이래서 비 오는 날이 제일 싫다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워 세면대로 향했다. 양치질을 하면서도 몇 번의 욕지기를 더 하고 겨우 나갈 준비를 맞췄다. 나올 것도 없는데 고개를 조금만 숙이면 목구멍까지 신물이 치솟았다. 시계를 보니 8시 10분이었다. 밖에서 클랙슨 울리는 소리가 짧고 길게 2번 들려왔다. 일어나자마자 혹시 몰라 불러놓은 택시가 도착한 모양이다. 나가기 전 현관 앞 거울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웃는 얼굴에 문제는 없는지 살짝 웃어도 보았다. 오래전부터 해 온 화장 덕에 백지장 같은 얼굴을 화사하게 가릴 수 있었다. 웃는 얼굴이 생기발랄했다.
"좋았어. 합격."
숨을 크고 천천히 들이쉬어 한번에 있는 힘껏 뱉어내고는 제일 높다란 굽을 한 구두를 발에 꿰어 신고 집을 나섰다. 빗물 떨어지는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내딛는데 집중했다. 하나만 생각하다 보면 두통도 어지럼증도 잊을 수 있었다. '또각또각' 소리가 온 아파트를 울려댔다. 나보고 최고라고 잘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응원가 같아서 자꾸만 바닥을 찍어내는 발에 힘이 들어갔다.
택시기사의 속사포 같은 말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빗길을 달린 끝에 녹음이 푸르른 탁 트인 곳에 도착했다. 택시비를 내고 거스름돈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바깥의 불빛이 차 안을 비출 때마다 보이던 분수 같은 운전사의 침방울들이 생각났다. 최대한 손이 닿지 않도록 장갑 낀 손 위에 얹혀 있는 동전들을 주워 지갑에 넣었다. 내리려고 문을 열고 한발 내 디디는데 '철퍽' 하는 묵직하고 축축한 소리가 들리더니 장딴지에 뭐가 들러붙는 것이 느껴졌다. 재빨리 내려다본 왼쪽 다리에 번들대는 진흙이 달라붙어 있었다. 꼭 피를 쪽쪽 빨아먹는 거머리 같이 보여서 손으로 털어내려다가 왼손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좀 전에 산 선물을 담은 종이가방이 왼 손목에서 달랑대다가 튀는 진흙에 맞고 말았다.
"재수 옴 붙었네."
머릿속에 치밀어 오르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택시도 이미 멀어져 라이트가 안 보이게 된 지 오래였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새 옷의 디자인 샘플을 가슴팍에 꼭 끌어안았다. 이마저도 진흙투성이가 되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어지니 마음에 안 들더라도 보물처럼 다뤄야 할 것이었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손수건으로 손과 다리에 묻은 진흙을 대충 수습했다. 언뜻 보인 손목시계는 9시 반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직 30분이나 남았으니 나머지는 제작소 화장실에서 처리하면 되겠다 싶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종종걸음으로 제작소 건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과수원부지였던 곳의 땅을 사들여 세운 곳이었다. 녹음이 푸르른 널찍한 땅 위에 낮고 옆으로 넓은 1층짜리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가운데 있는 넓은 입구를 통과하면 안내 데스크가 있다. 그곳을 통과해서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까지 단숨에 가기 위해 시뮬레이션을 해대느라 머릿속이 복작거렸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MC어패럴에서 왔습니다. 오늘 사장님과 약속이 있어서요. 일전에 말씀드린 옷의 샘플을 가지고 왔어요."
"어머, 연락 못 받으셨어요?"
"네?"
"아침 일찍 연락드렸는데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기억을 더듬었다. 문득 아침에 알람을 끄려고 몸부림치던 시간이 생각났다. 7시 반. 그러고 보니 아침을 챙겨 먹고 간답시고 알람은 6시에 맞췄었다. 급하게 전화기를 열어 부재중 통화를 확인했다. 정확히 7시 반에 제작소에서 온 전화 2통이 있었다. 마지막 통화에 부재중 녹음 메시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서둘러 나오느라 미쳐 확인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저희 사장님 고질병인 관절염이 도지셔서요. 오늘 병원에 가셨어요. 어쩌죠. 메모 남겨 드릴까요?"
"아니에요. 제가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저... 화장실 좀 빌려도 될까요."
비도 오는 날 이불속에서 뒹굴 거릴 수 있었다. 전화하나 확인을 못해서 종종 대며 여기까지 오다니.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게 지는 게 느껴졌다. 입을 옆으로 찢는 듯 어색한 웃음을 웃으며 화장실 빌린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번개같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뚜껑을 닫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누가 들으면 담배라도 피우는 줄 알까 봐 있는 데로 숨을 죽였다. 옆자리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좀 전에 들어올 때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누가 있었던 모양이다. 뭘 하는지 한참을 부스럭 대다가 소리가 멈췄다. 가만히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훌쩍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물이 맺혀 떨어지는 듯한 '툭툭' 소리도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다.
'무슨 일이 있나?'
지난번 폭우가 쏟아지던 날 화장실에서 쓰러졌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벌떡 몸을 세우고 옆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디 안 좋으신가요? 괜찮으세요?"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 괜찮아요..."
한참만에 대답이 왔다. 소리가 너무 작고 웅얼거려서 잘 들리지가 않았다. 화장실벽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고는 다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 제가... 혼자 너무 외로워서..."
어디 지방에서 홀로 여기까지 온 건가 싶었다. 나야말로 5년 전쯤 지방에 있다가 서울로 취직해서 나온지라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옆칸 사람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나오신 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저도 5년 전쯤 지방에서 올라왔거든요."
"... 어제요. 함께 했던 가족들과 헤어져 왔어요... 원래 이런 짜리 몽땅한 몸도 아닌데 다 제멋대로 바뀌어가지고는 거울을 봐도 제가 아닌 것 같고요..."
스트레스로 살이라도 쪘다는 건가 싶었다.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 것 같아 괜한 안도감에 몸에 힘이 빠졌다. 축 처진 어깨를 타고 꾸역꾸역 자료를 쑤셔 넣은 가방 끈이 흘러내렸다.
"상심이 너무 크신가 봐요.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서 오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 경주에서 왔어요..."
"어머, 저희 집은 울산이에요. 어쩌면 우리 어딘가에서 스쳤을지도 모르겠어요."
"... 네, 저희 가족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있어서 아마 제가 아는 누군가와 함께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아... 네에"
대체 가족이 몇 명이길래 전국으로 흩어진 사람과 생판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이 함께 한다는 건가. 내가 아는 사람인가.
"저기, 저 아세요?"
"거기 옆에 제 동생이 있거든요."
"옆에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무릎 위에 소중히 얹어두었던 디자인 샘플이 바닥으로 떨어져 널브러졌다. 화장실 문 옆에 세워둔 우산 때문에 물웅덩이가 생겼었는데... 자꾸만 다른 생각이 떠오르려고 했다. 괜히 세차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필 때였다.
누군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칸마다 문을 열고 부스럭 거리는 것이 청소를 하는 듯싶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변기를 닦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왔다. 갑자기 '쾅' 하며 앉아 있는 칸 벽에 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옆자리에도 사람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뭐야 누가 이랬어. 누가 휴지를 이렇게 다 적셔가지고 이래놨어. 에잇, 못해먹겠네. 한두 번도 아니고 뭐야 이게."
엉거주춤 일어난 자세로 두리번거리던 몸이 갑자기 막대기라도 된 듯 굳어버렸다. 오소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꽉 묶어 위로 올린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아, 맞네... 나 가끔 이상한 게 들리지. 이런 저기압인 날엔 나오는 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