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벤자민!

'맴~맴~맴~맴~'


입고 있던 옷을 아무리 벗어봐도 시원하지가 않고 가만히만 있어도 어디서 솟아나는지 땀이 줄줄 흐른다 싶으면 땅 속에서 나온 매미들의 합창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이럴 땐 달궈진 몸을 시원하게 달래줄 먹을 것 생각이 절실하다. 몸속까지 익어버릴 것 같은 날 먹는 수박만큼 맛있는 것이 또 있을까?


뾰족하게 날 선 얄찍한 수박들을 쟁반 가득 담아놓고 달달하지만 어딘지 맹~한 풀 맛이 나는 분홍빛 국물을 줄줄 흘리며 두 다리 쫙! 벌리고 앉아서 먹는 맛은 정말 최고다. 꽉 찬 냉장고에 든 잡다한 먹을 것들을 테트리스 하듯이 밀어내고 우겨넣어 차갑게 식힌 수박은 '서걱' 하고 한입 깨물면 입 안이 다 얼얼해진다. 눈치 없는 내 침샘이 따뜻한 침으로 시원해진 입 안을 다 덥혀버리기 전에 꼭꼭 씹으면 달달한 수박 물이 넘쳐흘러 나도 모르게 꿀꺽 삼키게 된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수박 물은 또 어찌나 시원한지 뱃속까지 내려가는 게 다 느껴질 지경이다. '이 맛에 수박을 먹는 거지!'


"많이 먹으면 밤에 오줌 싸니까 조금만 먹어."


어린 시절 저녁 먹고 후식으로 나온 수박에 달라붙어 초록색 껍데기가 드러나도록 속살을 긁어먹고 있으면 엄마의 걱정스러운 한마디가 날아왔다. 화장실이야 알아서 갈 텐데 무슨 걱정인가 싶어 괜찮다며 더 달라고 해서 가족들이 다 먹고 자리를 뜰 때까지 수박껍질까지 쪽쪽 빨아먹었다. 그런 날 밤은 잘 자기는 글렀다. 자꾸만 화장실이 가고 싶어 눈이 떠지는데 어린 마음에 눈앞에 보이는 화장실까지의 어두운 길이 왜 그렇게 가기 싫던지. '엄마 말 듣을걸' 하는 생각과 함께 다리를 벌벌 떨어댈 때까지 몸을 비비 꼬다가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들어가길 반복한다.


나는 수박이 좋다.


커다란 수박을 알지도 못하면서 잘 익었나 본다고 통통 두드려보는 것도 좋고, 화채 스푼으로 쓰윽 돌려 자꾸만 입에 넣고 싶어지는 동글동글 빨간 수박 공을 떠내는 것도 좋고, 칼을 넣고 살짝 힘을 주면 쩍! 하고 갈라지며 나는 소리도 좋다. 내 기억 속에 수박은 늘 두 팔 가득 들어올 만큼 커다랬는데 자꾸 더 먹고 싶어 감질나는 귤이나 사과 같은 작은 과일과 달리 실컷 먹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하얗고 파란 색색의 비닐 끈으로 만들어진 그물 같은 것에 담긴 수박은 사들고 올 때면 그러진 손이 허예져 떨어질 것 같이 무거웠지만 이리저리 옮겨 들면서도 좋았다.


일본에 와서 늘 한국에서 먹던 커다란 수박을 꿈꿔왔지만 사다 먹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슈퍼에 가면 잘라진 수박만 진열되어 있었다. 가끔 커다란 녀석이 보여서 살라치면 이건 또 왜 이렇게 비싼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날이 더워지려 하니 수박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아이가 넷으로 늘어나고 코로나 사태도 계속되다 보니 장보는 것도 인터넷을 주로 이용하게 되었는데 문득 수박이 먹고 싶어 찾아보니 커다란 수박이 화면 가득 보인다. 4월부터 따뜻한 아래쪽 지방에서는 수박이 나오기 시작한다는데 5월이 끝나가는 이제야 찾아보다니. 6월이 지나면 위쪽 지방 수박으로 옮겨 가는데 그전에 얼른 먹어보고 싶어 '와케아리(訳あり)'라고 하는 제값에 사는 것보다 삐까뻔쩍하지 않고 살짝 이유가 있지만 대신 싸다는 수박을 샀다. 이유 중에 안쪽이 너무 익어 갈라져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수확철이 끝날 무렵에 많이 보인다는 말에 아직 5월이니 괜찮겠다 싶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 드디어 수박이 도착했다. 커다란 상자에 잘 담긴 동그란 수박은 왠지 한번 두들겨줘야 할 것 같아 귀를 가져다 대고 두들겨대니 통통! 하는 소리가 꼭 '나 잘 익었다고!' 하는 것 같다.


동그란 수박은 처음 보는 둥이들에게 이리저리 구경 울 시켜주고 만져보라고 내주니 둥글둥글 굴려보며 신이 났다. 수박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둘째도 달려들어 힘자랑을 한다고 들었다 놨다 난리법석이다. 조금 있으니 학교에서 돌아온 첫째가 가세했다.


요즘 우리 첫째는 한참 자기 잘난 멋에 사는데 어깨를 들썩대며 살짝 턱을 내민 채 눈을 내리깔고 걷는 꼴을 보고 있자면 실소가 절로 나온다. 첫째라서 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건지 그놈의 잘난 멋 때문인지 꼭 둘째나 둥이들 앞에서 뭐든 너희보다 낫다고 보여주려는 구석이 있는데 그날은 수박이 대상이었다.


갑자기 상자에서 수박을 꺼내 이리저리 들고 다녔다. 무거워서 들고 있는 두 팔을 바닥을 향해 늘어뜨리고 허리를 구부린 채 걷는 폼이 꼭 홀쭉한 고릴라 같았다. 두 팔 가득 들어오는 수박은 5킬로가 넘는 크기라서 어른이 들어 올릴 때에도 '끄응'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라 불안한 마음에 '조심해!' 소리가 자꾸만 나왔다.


"벤자민이야, 내가 이름 붙였어." 자기가 붙인 이름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벌게진 얼굴에 미소를 띠며 첫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생뚱맞은 이름에 왜 그렇게 지었냐니 좋아하는 유튜버의 방송에 나온 누군가의 이름이 그렇다나. '이름 짓는 센스 하고는...' 어이가 없어 웃고 있는데 "벤자민~ 벤자민~" 하며 들고 다닌다고 난리다. 한동안 돌아다니다 힘자랑을 다 했는지 다시 상자로 다가가는 아이를 보며 '혼자서 저걸 어떻게 넣으려고 그러지?' 하는 생각을 했다. 수박은 제 몸집에 맞는 상자에 담겨왔는데 첫째가 꺼내고 나서 날개가 저절로 닫혀 입구가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타이밍을 재고 있을 때였다.


'파삭!'


손에 들려 있던 녀석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뭐 하는 거야!" 나도 깜짝 놀랄 만큼 큰 목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놀랜 선둥이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아앙~" 하며 울어서 미안하다고 달래며 첫째를 올려다보니 자기도 머쓱한지 머리를 긁으며 쏙 내민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아댄다. 왠지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 갑자기 큰 소리를 내서 나도 뻘쭘했지만 그러게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둥의 말을 내뱉었다.


으깨진 수박 사이로 줄줄 흘러나와 점점 늘어가는 분홍 물을 보고 있자니 아까운 마음에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어찌나 잘 익었는지 수박은 멋지게 반으로 쫙 쪼개져버렸다. 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통에 재빨리 볼에 옮겨놓고 잘라보니 안쪽의 속살도 떨어질 때의 충격 때문인지 밑으로 쏠리듯 무너져 내려있었다. 이유가 있어서 싸다더니 너무 잘 익어서 안 쪽이 갈라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걸 '하즈레(ハズレ)', 꽝!이라고 한다.


함께 지켜보고 있던 할머니가 재빨리 걸래를 가져와서 휴지와 둥이들 기저귀 갈 때 쓰는 물티슈를 손에 잔뜩 쥐고 닦는 첫째와 내 곁으로 오셔서 셋이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바닥을 훔쳤다. 그 와중에 할머니는 떨어져 나온 수박 덩어리를 드시며 왜 먹냐는 첫째 입에도 넣어주시는데 "얘 이름은 벤쟈민이야!" 하고 밝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첫째의 얼굴이 곤란함에 굳어진 얼굴에 오버랩되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벤자민은 무슨 벤자민이여!"


이 수박은 어쩌다 우리 집에 와서 요상한 이름이 붙은 채 바닥에 처박혀 속살을 뱉어내야만 했을까.

하지 말라는 걸 꼭 하다가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걸 재현이라도 해주겠다는 듯이 고대로 벌이는 첫째는 곤란해하던 표정만큼 반성도 했을까.


웃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별 생각을 다 했다.


다행히 벤자민은 흘려보낸 물보다 더 많은 단물을 빨간 속살 속에 가득 담아두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들여다보이는 그릇그릇 담긴 터져버린 수박 속살과 거기서 나온 분홍 물에서 '벤자민!'이라 말하는 첫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벤자민, 고생했어. 맛있게 먹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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