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먹한 산문집 프롤로그
그날은 비가 왔다. 수업을 듣던 중, 창문에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거세게 내리는 힘찬 빗줄기를 보며 나는 다짐했다. 생라면에 대한 글을 쓰기로. 며칠 전, 교내 신문부에서 편집을 담당하는 친구에게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이후로,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정말 비가 왔다. 그러니까 빗줄기 사이사이로 꼬불꼬불한 생라면의 환영이 보였다. 이것은 운명이로구나하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옆 옆 옆반으로 달려가 친구에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
"(흐어억) 있잖아. 나, 생라면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어? 생라면? 라면도 아니고?"
"어! 내가 생라면 먹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걸 써보면 어떨까."
"음, 그냥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거 쓰는 게 좋을 거 같아."
인생 최초의 청탁인 셈이었다. 그러니까 인생 최초의 원고 주제를 거절당한 셈이기도 했다. 친구와 꼬불꼬불한 생라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종소리가 울렸고, 나는 다시 옆 옆 옆반으로 달려가야 했다. 겅중겅중 뛰어가는 나에게 친구는 이렇게 소리쳤다.
"생라면 ~~~~~말고~~~~"
그것은 내게 너말고네언니라는 말보다 더 황당한 말이었다. 생라면을 대체할 수 있는 게 또 있다고? 분명 처음에는 내가 쓰고 싶은 주제로,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부담 없이 글 하나만 써달라고 했으면서 생라면 말고라고라고. 나는 결국, 보통의 고등학교 신문에서 볼법한 재미는 없지만, 선생님들이 보기에 만족스러우며 교훈적인 글을 쓰고 친구에게 떡볶이를 얻어먹었다.
과자의 취향조차 없던 어린 시절, 생라면이라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것은 중학생 때였다. 하교 후,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면 우리는 늘 슈퍼에 들려 라면을 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라면도 아니고, 진라면 매운맛도 아닌 <<스낵면>>을 골라야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싸니까. 하지만 얇디얇은 면 사이사이마다 진하게 베이는 스프의 맛, 그 조화는 기가 막혔다.
물론, 매번 같은 라면만 먹다 보니 조금 질리기는 했지만, 누구 하나 몇백 원 더 비싼 신라면을 사보자는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 위기 속에서 기회를 만들어내는 인류 아닌가. 한 친구의 제안으로 라면 물을 끓이는 대신, 라면봉지를 들고 퍽 퍽 부수었다. 바로 생라면을 먹자는 것이었다.
그 귀한 라면, 십시일반 모으고 모아서 산 라면이 인간의 식욕으로 말미암아 무력하게 부서지는 것을 보며 아, 이렇게 먹고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52초 후, 나는 생라면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생라면 위에 수북하게 덮인 라면수프를 조금 털어내고 곧장 입으로 넣어 어금니로 깨물어먹었을 때, 머리를 울리는 오독오독 라면 씹는 소리. 머릿속에서 희망의 보신각 종소리가 들렸다.
아 개 맛있어. 그건 분명히 대박이었다. 친절하게 뿌셔먹으라고 출시 된 뿌셔뿌셔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뿌셔뿌셔가 초딩들이 먹는 단순한 맛이라면, 생라면은 어른이 되기 전 먹어줘야 하는 고오급진 느낌이 났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생라면에 진심인 사람이 되었다. 몇백 원으로 몇만 원어치의 행복을 꼭꼭 씹어 먹는 사람, 작은 것에서 만족을 얻어내는 사람.
그러니까, 나는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 몇 백 원, 몇 천 원 하는 간식들을 먹으며 행복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소박하지만 화려한 만족을 주는 그 작은 먹거리들을 떠올리며. 먹고 체하지 않을 만큼 배부른 먹먹한 글을 쓰고 싶다. 그것이 고작 생라면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