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니 Apr 21. 2021

나를 움직인 것은 고작 용변이었다.

잘 싸는 것만으로도 나이스 하니까.

(정말 용변에 관한 이야기라 식사 후 보셨으면..)



때때로 엄청난 불안을 느낀다.  옆에는 언제나 든든한 나무 같은 남편이 있고, 주말마다 감자전을 부쳐주겠으니 놀러 오라는 아빠, 엄마도 있고, 먹고살만한 적당한 돈이 있는데도 PMS(생리  증후군) 나를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증상은 생리 7 , 극심하게 나타난다.


PMS 기간에는 정말 별것 아닌 일에 쉽게 눈물이 난다. 사흘 동안 밥솥에 있느라 눌러붙어버린 밥풀들을 버리면서, 트럭 위에 대충 실려진 양파 더미를 보면서, 고래밥이 먹고 싶었는데 왕고래밥만 팔아서, 음식물쓰레기 냄새가 너무 심해서, 꽃이 너무 활짝 펴서. 이유도 가지가지다. 불확실한 감정의 이유는 셀 수가 없다. 한 달에 한번은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무력하게 만든다.


며칠 전에도 어김없이 그날이 찾아왔다. 남편과 함께 맛있는 갈비만두를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입구가 가까워지자 숨이 턱 막혔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나 집에 가기 싫어.."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집에 왜 들어가기 싫어."

"몰라,, 눈물 날 거 같아.. 안방 문은 닫히지도 않고 오오!!"

(=혼자 남편 몰래 울고 싶은데 방문이 닫히지 않는 방에서 울면 우는 모습을 들킬까봐 싫다는 )



밖에 나가서  걸을까,  안에서 노래를 들을까 이야기하는 남편에게 2병에 단단히 걸린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그냥 혼자 있고 싶어. 차 안에서 나무들 보면서 있을게.. 먼저 들어가.."


"음, 그럼 나는 웹툰 보고 있을게요오오옹"이라고 말했던 남편은 5분도 되지 않아 갑자기 큰일이 생겼다며 먼저 집에 들어가야겠다며 난리를 쳤다.


갑자기 왜?


남편은 곧 울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급똥이 와 가지고오오옹~!~!~!"


그렇지, 급똥은 싸야지..라고 끄덕이는 내게 차키를 내어주고 현관으로 뛰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도대체 똥이란 것은 무엇이기에 나이 서른이 넘어도 똥에 웃고 울게 되는 것일까 등의 생각을 하다 보니 또다시 우울감에 빠졌다.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다. 나조차도 무슨 감정선인지 모르고 날뛰는 순간, 순간들.


다시 숨을 고르평온을 되찾으려 노력하던 그때, 그러니까 남편이 급똥을 싸러 로켓처럼 튀어 나간  오분도  되었을 , 나는 급히 차문을 닫고 남편이 닦아놓은  길로 뛰어갔다.  순간에는  이상 우울감도,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화장실 변기만이 생각날 .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어야  텐데, 남편이 변기 위에 앉아있으면   텐데,  우리 집은 16층인 걸까, 다음에는 아무래도 저층에 살아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도 엘리베이터는 1층에 있었고, 우리 집 변기는 공석이었으며 나는 안전하게 용변을 처리할 수 있었다. 나의 용건은 고작 용변이었고, 그러니까 나를 움직인 것은 고작 용변이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 사태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변기 위에서 웃어버렸다. 용건을 마치고 조우한 우리는 서로의 급박했던 순간들을 무용담처럼 나누었다.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남편의 급똥 역사는 장편소설 급으로 다루어도  만큼 에피소드가 은데, 며칠 전에는 드라이브를 하던 남편이 갑자기 노브랜드로 직진했다. 주차를 하면서 제발 기도  해달라고 부탁까지하는 남편. 역시 오늘의 주제도 급똥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남편이 똥을 바지에 지리지 않게 해 주시고 화장실로 가는 걸음마다 온정을 베푸셔서...."


우스갯소리를 버무리며 장난으로 급똥을 위한 기도를 마치자 남편은 세상 큰 목소리로 아멘~! 을 외쳤다. 부축해 주겠다는 나의 손길도 마다한 채 남편은 천천히, 아주 처언천히 보폭을 넓히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 모습이 꼭 걸음마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아기의 모습처럼 귀여웠다. 활짝 열려있는 남자화장실의 문으로 들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웃겨서 미칠 뻔했다. 몇 분 뒤, 환한 웃음으로 화장실 문을 나오는 남편이 오늘은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죽다 살아났다며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내었다. 나는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남편을 보며 진한 은혜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보니 나도 저런 적이 몇 번 있었다. 달리는 고속도로 위에서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 한 적이 있다. 이번 일만 잘 넘기게해주시면 진짜 진짜 착하게 살고, 베풀고, 효도하며 살겠다고.

아무 건물이나 들어갔는데 화장실 문이 잠겨있지않고 개방되어있을 때, 급히 들어온 화장실 안에 두루마리 휴지가 비치되어 있을 때 나는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감사하다는 마음마저 들었었는데, 용변을 처리한 후 30분만 지나도 그 감사를 잊는 게 또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끔 무력해질때는 급똥위기를 해결했던 불쾌한 스릴의 순간을 생각한다. 세상일이 변기 위의 일처럼 단순하게 싸고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인생은 만만한 놈일리가 없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쉽게 마음에 스크래치가 나고, 또 아무것도 아닌 일에 회복하는 것의 반복이 인생이 아닐까?


어차피 당해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냥 단순하게 살아보는 것도 방법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변을 변기 위에 나이스 하게 처리하는 작은 일에도 스스로를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화장실 변기의 존재에 감사하면서. 고작 용변이겠지만 무려 용변이기도 하니까.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한 것이라는 사실은 알 수없는 불안을 잠재우기도 하니까. 무력한 나를 움직인 것은 고작 용변인 세상을 살기 위해, 나는 용변의 힘을 믿어보기로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니, 뭐 이런 개나리를 봤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