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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May 14. 2021

샤기를 당하고만 젊은이의 결말

남들에게는 멋, 나에게는 못, 나에게 맞는 옷

"너 사기당한 거 아니냐?"

언니가 내 꼴을 보자마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니, 사기가 아니라 샤기.. 컷인데.."

(샤기 : 불규칙적으로 커트된 상태)


20대 초반, (20살인지 21살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 불쾌한 공기, 게다가 목에 달라붙는 머리카락 때문에 성질이 나버린 상태로 롯데리아에 들어가 아이스크림 콘을 먹고 있던 때였다. 그때 내게 운명처럼 보였던 세 글자. 미/용/실.


그곳은 일본 모델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져 있는, 얼핏 보면 일본 미용실 같았다. 커트 가격이 다른 곳보다 비쌌고, 간판에는 특이한 머리를 하고 있는 일본 여성이 노려보고 있어서, 왠지 갈 마음이 쉽게 들지는 않았던 곳이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나는 그곳 미용실 의자에 앉아있었다. 하하.


안경을 벗고, 눈을 감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를 상상하며  머리를 맡겼다. "그냥 다듬어주세요." 한마디에 곧장 샥샥 가위소리가  귀를 스쳤다. 소리만으로도 시원했다. " 됐습니다.", "? 벌써요?" 경쾌한 말소리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안경을 얼굴에 급히 올렸다. 그리고 거울로  나는 벽지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일본여자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샤기컷 의대 표주자_동방신기

당황스러웠다. 거울에는 너무 많은 것이 겹쳐있었다. 믿을  없었다.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느라 화가  듯한 로커, 신주쿠를 거니는 일본 젊은이, 너무 오래 사용해서 손상된 빗자루까지.. 종합 3 세트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건 꿈일 거야.. 이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를 만졌다. 뒷머리를 쓸어서 앞으로 모으려 해도 좀처럼 모아지지 않고, 작은 손에도 머리카락은 담아지지 않고 스치기만 샜다. 그러니까, 분명 머리털이 달려있는데, 뭔가 비어 있는 느낌. 그렇다. 그건 샤기컷이었다. 언니 말처럼 사기를 당한  아니었다. 샤기를 당했을 .



남들에게는 멋, 나에게는 못, 나에게 맞는 옷

그날 이후, 안 그래도 머리털이 없는 앤 데, 왜 그렇게 잘랐느냐는 말을 수두룩 없이 들어야 했다. 내가 내 머리털을 지켜야 했는데.. 머리털을 잃고 나니 남들에게는 멋이어도, 내게는 멋 대신 못나게 보인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래, 나에게 맞는 옷을 입어야지. 샤기컷을 하고 어퍼컷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어릴 때 나는 머리숱이 유난히 없어서 <아기보살>이라는 별명을 들었고, 심지어 아들로 오해받는 일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엄마는 소중한 자식의 정체성을 지켜주기 위해, 머리핀, 머리띠를 광적으로 내 머리 위에 올렸지만 모두 실패, 결국 엄마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는 마음으로 기도했다고 한다. 머리숱이 많아지기를..


그런데,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머리털은 났지만, 머리숱이 많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말은 틀렸다. 그리고 숱과 털은 별개였다. 요즘은 머리를 감을 때마다 숭숭하고 잘도 빠진다. 어떻게 갈수록 머리카락도 힘을 잃어가는지, 점점 나를 떠나는 느낌이다. 적은 머리숱은 영원한 나의 과제이자, 자식 같은 존재다. 늘 신경 쓰게 되는, 잘 있나 들여다보게 되는.

때문에, 나는 단발을 고수한다. 특히, 여름철이 되면 무조건 머리를 탁! 하고 잘라버린다. '동그랗고 갸름하지 않은 얼굴에 가장 어울리는 머리스타일이 뭔가요?'라는 질문을 지식인에 올릴 뻔한 정도로 스타일에 나름 고민 많던 20대. 나는 결국 단발을 택했고 몇 년째 그 스타일을 유지 중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머리 감을 때도, 말릴 때도, 평상시에도 편하기만 하고, <단발>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이니까.


여신머리라고 불리는 웨이브, 씨컬, S컬, 내추럴 펌 등등. 많은 멋스러운 스타일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다름 아닌 <단발>. 더이상 찰랑거리는 웨이브를 보고도 혹하지 않는다.  샤기를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유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아, 이 얼마나 값진 샤기였는가. 그는 내 머리털을 구원하러 온 좋은 샤기였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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