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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Jun 02. 2021

내 이름은 탐정, 강아지죠.

명탐정 강아지에게 무릎 꿇게 된 사연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훈련사 강형욱 님의 훈련 방식을 보면,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강아지가 저런 이상행동을 하는 것은 결국 저런 이유였구나. 사람만 보면 공격성을 보이며 크르러어엉 짖어대는 이유가 저런 이유였구나 하면서 이해하고, 끄덕이다 보면 그 시절 나의 사랑, 사랑이가 떠오른다.



@unplash/Matthew Hamilton

이름: 사랑이 / 성별: 여 / 성격: 활발, 온순


사랑이는 10년 전, 작은 고모가 키우던 하얀 말티즈였다. 혼자 독립해서 오피스텔에서 사는 고모는 외롭다며 강아지를 키우기로 했고, 그날은 착한 조카 4명이 모여 고모네 집에 놀러 간 날이었다. 나는 하얀 크로스백을 화장대 옆에 내려놓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어느새 나의 발끝에 도착한 사랑이가 내 양말에 얼굴을 파묻고 헥헥거리고 있었다. 아우, 참 사랑이 많은 사랑이구나. 발 냄새까지 사랑한다니..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문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사랑이가 캉캉 짖어댔다. "오구오구 사랑아, 조금만 있어. 금방 올게. 아이고 잘한다" 고모가 사랑이의 얼굴을 비비며 뽀뽀를 해주자 사랑이는 금방 조용해졌다. 고모는 영화를 보러 가는 내내, 사랑이 자랑을 멈추 않았다. 너네도 하루만 사랑이랑 있어보면, 집에 가기 싫을 거라는 말까지 들었다. 글쎄..?



영화를 보고, 햄버거를 먹고 돌아온 나는 오피스텔에 들어가자마자 급한 용무를 처리하고 나오던 참이었다. 사촌동생이 "헐 언니 사랑이가..."라는 말을 내뱉으며 초조한 듯 내 눈치를 살폈다. 거실 바닥에는 어딘가 낯익은 소지품들이 질서 없이 어질러져 있었다.




사랑이가 끄집어낸 나의 비밀

어? 이거 내 지갑인데? 그렇다. 사랑이는 수많은 가방들 사이에서 본인 몸처럼 하얀 내 가방을 방바닥에 쏟아낸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가방 안, 자크가 고장 난 지갑에 넣어두었던 (구) 남자 친구와의 스티커 사진 3장을 만천하에 공개해버린 것이었다. 엄마에게 들킬 까 봐 늘 가방 안에 두고 다닌 사진이었다.


침대 위에 앉은 고모는 두 볼을 맞대고 손으로 하트를 그리고 있는 조카의 스티커 사진을 보면서 연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머, 어머. 히트다 히트.. 그렇게 나는 고모, 사촌동생, 그리고 가장 밝히기 싫었던 언니에게 연애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남자 친구는 몇 살이냐, 언제부터 사귀었냐, 같은 학교냐,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냐, 네가 왜 좋다고 하냐, 이유가 뭐냐 등등의 휘몰아치는 질문 공격을 받는 도중에도 사랑이는 내 무릎에 앉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말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의 사랑이 세상에 까발려질지는 몰랐기에 사랑이가 미웠다. 왜 하필 그래야 했니, 왜 꼭 내 가방이어야만 했니, 왜 지갑을 뒤지고야 말았니.라고 물어도 사랑이는 답이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공개연애를 하고 나니 좋은 점도 있었다. 더 이상 주말에 데이트하러 갈 때마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선물로 받은 꽃다발을 마음 편히 집으로 들고 올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사랑이는 내게 사랑의 자유를 주었다. 남자 친구의 정체를 숨겨가며, 사랑을 숨겼던 숨 막히는 시간들을 사랑이가 한 번에 아주 깔끔하게 정리 해준 셈이었다. 공개연애를 하면 세상이 끝장 날 줄 알았던 어리석은 내게 용기를 심어준 나의 사랑이.


스승의 날이 되면 은사님 대신 나는 사랑이를 떠올린다. 사랑이 덕에 그 후에도 사랑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편하게,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사랑이야말로 내게 크고 소중한 은사님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뛰어다니고 있을 사랑이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러본다. 아아, 고마워라 사랑이의 은혜, 아아아 보답하리 사랑의 으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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