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그 미안함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2017년, 아빠가 뜬금없이 학교에 다니겠다고 말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아버지학교"(교회의 한 프로그램)에 다니게 된 아빠. 엄마는 이왕 다닐 거, 애들 어릴 때나 하지 왜 이제 와서 하려냐며 아빠를 혼냈다. 엄마 말이 맞았다. 아빠는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모범생의 각오로 임했다.
아빠는 난데없이 자식을 안아주기, 잠들기 전에 사랑한다고 표현하기, 자식들의 장점, 단점 찾아주기 등을 하며 자식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곧 서른 줄을 마주하고 있는 자식들과 함께 하기에는 다소 고난도의 과제들이었지만, 아빠에게 대충이란 없었다.
덕분에 우리는 한 달 내내 아빠와 악수를 한다거나, 포옹을 해야 했다. 밥을 먹다가 뜬금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아야 했다. 한평생 사랑 표현에 어색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자식들이기에, 아빠의 달라진 모습에 적응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 친구에게는 사랑해! 사랑해!라는 표현을 쉽게 하면서도,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듣는 것을 이상한 일처럼 여겼던 때였다. 엄마와 아빠 앞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부모에게 자식이란, 자식에게 부모란, 자식에게 사랑이란 같은 추상적인 생각에 가로막혀 자주 멈칫했다.
"며칠 뒤에 편지가 올 거야."
이번에도 아빠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무슨 편지?"
"그런 게 있어. 그 숙제."
"아.."
그리고 며칠 뒤, 정말 편지가 왔다. 보내는 곳-아버지학교의 아빠, 받는 곳-우리 집, 나. 아니, 편지를 쓰는 게 숙제라면 그냥 집에서 직접 주지, 꼭 우표를 붙여 보내야 했을까? 의아해하며 우편함에서 총 세 통의 편지를 꺼내어 집으로 돌아왔다. 러닝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옥수수를 까먹는 아빠에게 편지를 받았다는 말을 숨긴 채, 방문을 닫았다. 침대에 누워 편지를 뜯었다. 세상에, 그곳에는 엔터를 한 번도 치지 않아 빽빽한 글씨로 뒤덮인 장문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나는 줄을 바꾸어 읽을까 봐 자를 대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편지에는 고난과 다행이라는 말이 여러 번 쓰여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30년이라는 세월이 청춘과 함께 구름 속에 밀려가버렸다고 말하는 아빠, 순간순간 고난과 고통에 가로막히지 말라고, 다 지나가는 순간일 뿐이라며 마음속에 콕콕 박히는 감동문구를 건네는 아빠는 내가 알던 아빠가 아닌 것 같았다. 순간, 대필 아냐? 예시로 문장이 있는 거 아녀? 불효녀의 망상이 시작됐을 때였다.
다음 문장을 보자마자 나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버렸다.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아빠가 투자를 잘못하여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어 너에게 그 흔한 어학연수나 외국 배낭여행 한번 시켜주지 못해 너무나 아쉽게 느껴지는구나. 그래도 ㅇㅇ는 착해서 아빠한테 이런 면에서는 불편불만 없이 잘 자라 주어서....(중략)
지금까지 네에게 사랑한다는 표현 한번 해보지 못하고 너의 말을 경청하지도 않은 체 아빠의 편협하고 획일적인 사고방식을 강요한 거 같아 미안하구나 그래도 무척 다행인 것은 아버지학교에 다니면서 너에게 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표현과..(생략)
아빠는 내게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그 미안함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 때, 주식투자에 실패한 뒤로 우리 집은 휘청 흔들렸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당시 나는 몰랐다. 엄마와 아빠는 때가 되면 삼겹살을 사주고, 문제집을 사주었으니까.
어학연수나 외국 배낭여행도 그렇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남들 다 하는 그런 평범한 것들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는 일은 겁이 많은 내게는 그다지 끌리지 않는 일이었는데, 아빠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이렇게 미안해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편지 한 장을 다 읽는데 10분의 시간이 걸렸다. 옥수수를 먹고 있는 아빠에게 옥수수가 맛있냐고 말을 건네야 할지, 편지 잘 보았다고 카톡을 해야 할지 알 길이 없던 나는 편지를 챙겨 동네 카페로 피신을 갔다.
동네 카페에 죽치고 앉아있는데 언니가 왔다. 언니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종이를 들고 나왔다며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거 지금 읽으면 졸라 슬플지도. 지금 읽지 마. 집에 가서 읽어." 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늘 그렇듯 무심하게 봉투를 찌익 찢었다. 언니의 편지에도 엄청난 길이의 글이 쓰여있었다. 언니는 글을 다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간중간, 풉, 킥, 으악과 같은 소리를 연발했을 뿐. 언니에게는 티슈 한 장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 개 웃기네."
뭐가 개 웃기다는 거지. 장녀인 언니에게는 재미있는 우화 같은 이야기를 써놓은 걸까,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당장 언니의 편지를 낚아채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장녀로서 잘 챙기며 살아주어 고맙다는 말, 늘 최선을 다하여 또 고맙다는 말을 보며 대리 감동을 느끼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높은 방지턱을 만난 사람처럼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아니, 이게 뭐야."
언니에게 쓴 아빠의 편지 중반에는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그리고 아빠가 투자를 잘못하여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어 너에게 그 흔한 어학연수나 외국 배낭여행 한번 시켜주지 못해 너무나 아쉽게 느껴지는구나. 그래도 ㅇㅇ는 착해서 아빠한테 이런 면에서는 불편불만 없이 잘 자라 주어서....(중략)'
그리고 아빠가 투자를...이라고 시작되는 문장, 나의 편지에도 등장했던 그 문장, 이름만 바꾸어서 지희(가명)는 착해서라고 쓰여있는 문장. 세상에. 이건 완전 표절이야. 아니지, 아빠가 썼으니 표절은 아니긴 한데.. 언니 말이 맞았다. 나는 그제야 아빠의 편지를 읽어도 눈물 대신 웃음이 났다. "아, 개 웃기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니다. 웃을 수만도 없었다. 아빠가 정말 미안해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더 미안해졌다. 아니다. 그래도 웃겼다. 컨트롤 씨, 컨트롤 브이를 해가며 3명이나 되는 자식들에게 편지를 쓰고 만족감에 기지개를 켰을 아빠를 생각하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 이게 내가 알던 아빠지.
이제야 아빠의 얼굴을 웃으며 볼 수 있을 것 같은 나는, 언니에게 서둘러 집에 가자고 재촉했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던 아빠가 현관까지 마주나와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랑한다." "아빠, 오늘이 숙제 마지막이지?"라는 멋없는 말을 주고, "어, 오늘이 끝이다."라는 말을 받으며. 우리는 평소보다 긴 포옹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