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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Feb 08. 2022

오천만 전 국민이 글쓰기 경력자인 이유

거창하지 않은 이야기, 일기

나는 지난주, 브런치에 글을 쓰지 못했다. 브런치뿐이 아니라, 블로그에도 1일 1포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민족 고유의 명절, 설날이 있었다는 것은 그럴듯한 핑계였고 글을 쓰는 행위가 너무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답답하다, 답답해! 를 외치다가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버렸다. 어쩔 수 없군, 창고를 열 수밖에. 나는 손을 뻗어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먼지가 케케이 묵은 일기장을 꺼냈다.


자, 보자 보자. 패기만으로 가득 찼던 초등학생 시절의 나를 만나보자. 몇 번을 봐도, 보고 또 봐도 내가 쓴 글이 제일 웃기다. 그 시절의 내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난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생각해보면 일기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었다.

참고로 나는 일기 쓰는 것에 중독이 되었었는데, 심할 때는 이것이 내가 태어난 소명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일기를 쓰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아 누워서도 발을 동동 구르며 무엇을 쓸까 고민했었는데, 잘하지는 못해도, 무엇이든 성실히 해야 한다고 말했던 어른들의 목소리가 맴돌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쓰는 것은 너무 재밌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내 인생에서 일기를 빼먹는 일은 만두소를 넣지 않고 만두를 만드는 일과 같았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는 말.


어른의 시각에서 보면, 그저 오늘 있었던 일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일을 쓰는 단순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시절의 초등학생이었던 내게는 매우 진지한 일이었다. 아무리 쥐어짜도 도저히 쓸 일이 없는 날에도 뭐라도 써야 했다. 잘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또박또박 글자를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밀리지 않고 쓰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거창하지 않은 이야기, 일기

일기 작가의 경력도 길어지다 보니 꼼수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 일은  내게 새로운 재미를 던져주었다. 일기를 써야 하는데, 쓸 이야기가 없을 때마다 내가 사용했던 꼼수는 다음과 같다. 집에서 키우는 콩나물에게 편지 쓰기, 태풍에게 협박 편지 쓰기, 라면의 기도와 유래 지어내기, 노스트라다무스 종말 이론 요약하기, 지금까지 배운 영어로 일기 쓰기, 언니에게 당한 억울한 일 토로하기, 겨울방학에게 편지 쓰기, 엄마 아빠 부부싸움 정리하기, 대중가요 분석하기, 동생이 좋아하는 캐릭터 소개하기 등등. 선생님이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우리 집 가정사를 남발하며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글을 써 내려갔다.



우리들의 솔직했던 시간.

6살 어린 동생의 장난기가 심해진 이후부터는 내 일기장은 얄미운 동생의 만행 고발장으로 변모해갔다. 생일 촛불을 끄는 것에 중독되어 촛불이 작아질 때까지 계속 촛불을 끄느라 맛있는 케이크가 촛농 범벅이 되었던 일,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다고 옆에서 깐죽대다가 내게 등짝을 맞았던 일, 방을 어지럽히고는 치우지 않아 레고 블록에 다쳤던 일 등등. 밤이 되면 스탠드를 켜고, 비장한 마음으로 동생의 만행을 고발하는 글을 썼다. 나쁘지 않았다.


엄마에게 이르면, 그래도 네가 누나인데 조금 참아줘라, 하는 말을 들을 게 뻔했기 때문에 일기장에 연필을 꾹꾹 눌러 솔직한 마음을 썼다. 게다가 글을 쓰고 나면, 코를 골며 잠을 자는 동생을 보면 측은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으니, 내게 일기는 치유와 마음 수양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때로는 언니에게 당했던 일도 자주 썼다.)



초등학교  일기 쓰라는 말을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단연코 없을 것이다. 오늘은 무얼 쓰냐,  것도 없는데  쓰지 생각하며 형제자매의 일기장을 훔쳐  기억도 있을 것이지만, 무엇을 계속 썼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글쓰기 경력자라고   있겠다. 일기장을 옆에 펼쳐둔  브런치를 켰다. 머릿속에 복잡하게 엉킨 생각을 하나씩  내려가기로 했다. 거창하지 않은 일상에서 느꼈던 솔직한 이야기만을 생각했다. 나는 단숨에 6개의 소재를 찾아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힘이 없지,   없는  아니었다.


무언가를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 읽는 이에게 교훈을 주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 단순한 일상은 단조롭다는 착각으로 무거워졌던 손가락이 천천히 자판 위에서 움직였다. 근두운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손오공의 발검 음보다 가볍게, 100m를 10초에 뛰어버리는 우사인보다 빠르게, 손가락은 단숨에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화면 위에 토해내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경력자였지... 그래, 그래.'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한껏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오지 않은 채로 오래도록 자판을 두드렸다,라고 일기장에 썼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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