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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Jan 25. 2022

57년생 아빠에게 배운 인생 등산 꿀팁

원래 그런 거야. 이 맛에 등산하는 거지

새해가 되자 언니가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 시시껄렁한 말을 보내고, 쇼핑링크를 보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등산을 같이 하자고 일주일을 조르는 것이 아닌가. 등산? 등산이라.. 등산에 좋지 않은 추억을 가진 나는 섣불리 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때가 열네 살이었나, 열다섯 살이었나. 아빠와 단둘이 동네 뒷산에 올랐던 날, 나는 도중에 혼자 산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말없이 성큼성큼 걷는 아빠의 뒷모습이 나무속으로 숨어버렸을 때, 빨리 걷기만 하는 아빠가 미워서 홧김에 나는 말도 없이 툴툴 대며 집으로 들어왔더랬.. 아, 아무래도 15살이었나 보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나는 등산이라면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하체가 부실해서 등산은 안 돼, 등산할 바에 공원이나 돌자, 라는 말로 등산파들의 간곡한 청을 못 들은 척, 못 본체 하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럼에도 언니의 등산 권유는 쉴 새 없이 계속됐다. 이쯤 되니 슬슬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갑자기, 등산을 가고 싶은지.


"아니, 갑자기 왜 계속 등산이야."

"돈 없는데 몸이라도 건강해야지."


우리는 최근, 동시에 소액으로 투자를 시작했고, 사이좋게 우리의 돈이 삭제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오버 좀 보태어서 가슴이 쿵쿵 박자에 맞추어 뛰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내게 지금 필요한 건 건강이지! 쿵쿵 짝! 등산 짝! 가자 짝!


그 길로 우리는 주말마다 동네 뒷산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고작 1 전망대를 찍고 온 것이 다였지만, 우리는 마치 히말라야를 정복한 사람들처럼 의기양양해져서는 서로의 기념사진을 찍어주기 바빴고, 차마 아스팔트 위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산속에서는 스스럼없이 나누며 자매의 우애를 다졌다.


그런데 일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이번에는 57년생 아빠가 새로운 제안을 한 것이다. 이제 1 전망대는 그만 가고, 봉! 봉을 찍고 오라는 아버지의 어명. 아니 아니, 아버지. 그 길은 매우 험하고 어려운 길이 아니옵니까, 다음에.. 다음에 가 보도록 하지요..라고 공손히 제안을 거절했지만, 아빠도 이번에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3주간의 평화로웠던 산행의 목적지는 관모봉이라는 새로운 좌표로 바뀌었고, 우리는 지난주 토요일 아빠를 따라 산 입구에 도착했다. 등산로 초입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앞에서 아빠의 브리핑이 시작됐다. "우리는 오늘 이 길로 안 가고, 여기 옆길로 가서 쭈우욱 올라갈 거거든?" 1 전망대에서 관모봉은 15분이면 간다는 아빠의 말에 씩 미소가 지어졌다. 별거 아니네, 별거 아니겠지, 뭐!


10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고 걷고 또 걸어도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와 언니는 이번에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고,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한 번 강하게 밀려오는 하산의 유혹을 뿌리치며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절반 이상은 온 것 같은데 중도하차는 아니었다. 콧물과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로 낙엽 밭인 지, 땅인지도 모를 곳을 천천히 올랐다.



나는 5분에 한 번꼴로 맞춘 알람처럼 끊임없이 아빠에게 물었다. 어디쯤 왔냐고, 나 죽겠다고 물으면 이제 거의 다 왔다고 하고,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얼마나 더 가야 돼야 하면, 저 바위만 넘으면 이제 진짜 다 왔다고 하고, 아니 아빠가 말한 바위도 넘었는데 도대체 관모봉이 어디냐 하면, 진짜 저기다 저기,라고 그제야 손을 뻣어 확인시켜주는데 세상에, 저기는 거의 다 온 게 아니잖아요.. 이제는 얼마큼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물어볼 힘도 빠진 나는 말없이 아빠와 언니 뒤를 따랐다. 그리고 저 멀리 들리는 언니의 목소리, "야, 진짜 다 왔다. 여기 올라오면 끝이야."



 아아아아아 , 미세먼지로 뒤덮인 전경이지만 내게는 선명도 10000% 색감으로 다가왔다. 감동이었다. 내가 토요일 12시에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이곳에 올라와있다니. 세상에! 하지만 감격도 잠시, 나는 아빠에게  올라오는 동안 거짓말을 했냐며 따져 물었다. 그러자 아빠는 바나나 하나를 내게 건네더니 먼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안 했으면 너 못 올라왔을걸? 원래 등산이 그런 거야. 이제부터 힘들다고, 아직 절반도 안 왔다고 하면 올라오고 싶겠냐. (바나나를 먹으며) 정상에서 바나나 먹으니까 맛있지? 원래 그런 거야. 이 맛에 등산하는 거지."


태극기가 펄럭이는 관모봉에서 먹는 바나나가 너무 맛있어서 나는 오늘도 나를 속인 아빠에게 얄밉다는 말도 못 하고는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웃었다. 우리는 모두 웃고 말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제  아닌듯한 돌처럼 무거워진 허벅지를 부여잡고 겨우겨우 샤워를 하고침대에 몸을 뉘어 잠을 청하려는데 진동이 울렸다. 아빠였다.


"아빠, 어 왜애"

"몸은 어떠냐, 괜찮냐."

", 생각만큼 아프진 않네. 아빠는 괜찮아?"

"난 괜찮지. 그래, 그럼 다음에는 태을봉 가자고."

"어..?... 어.."


내가 넘어야  산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것에    감격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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