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는 선착순. 입소가 이렇게 쉬워도 되나요

물류캠프 입소 수기 ① 첫 입소

by 프니

입소 일자: 2026.02.02

입소 장소: 동네 물류센터/잡화

입소 준비물: 커터칼, 장갑


저의 첫 입소 장소는 당근(알바)에서 5분 만에 정해졌습니다. 입소가 이렇게 쉬워도 되나요. 물론 감사한 마음입니다. 장갑과 커터칼까지 챙겨 오라는 말이 조금 의아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물을 챙긴 뒤 잠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6시.

캠프 담당자분께 문자가 왔습니다.

7시까지 연락이 오지 않으면 입소가 불가하다는 안내를 받았던 조는, 혹시라도 놓칠까 봐 5분 간격으로 알람을 맞춰두었습니다. 덕분에 칼같이 일어나 “출근 가능합니다”라는 답장을 보낸 뒤, 다시 잠에 들었습니다.

잠시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켜 대충 세안을 하고, 대충 구린 옷을 주워 입은 뒤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출발할 때도 한 번 더 연락을 보내야 했습니다. 입소는 쉬운 듯 보였지만, 사실은 두 번의 연락 미션을 통과해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아마 입소하겠다고 해놓고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겠지요.


어제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길을 걸어 물류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종종걸음으로 걷다 보니 겨우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명부에 이름과 출근 시간을 적고, 휴게실로 들어가라는 안내를 받았습니다. 휴게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색한 공간이었지만, 오늘 하루가 끝날 때까지 제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아직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8시 59분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작업장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류캠프에서는 잘 모르겠으면 일단 사람들을 따라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시나 그 말이 맞았습니다. 거대한 박스들이 가득한 공간. 어딘가 쌩한 기운이 도는 작업장 한가운데에 사람들이 동그랗게 모여 있었습니다. 그 중앙에는 이 구역의 작업 반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서 계셨습니다. 반장님은 일사불란하게 업무를 지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 안경 쓰신 여자분, 단발, 롱패딩 입으신 분 왼쪽으로 빠지실게요.

안경에 롱패딩까지 입은 저는 저를 말하는 것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더군요. 물류센터에 오는 사람들의 착장이 하나같이 비슷한 점도 재밌었습니다. (무릎 늘어난 추리닝, 보온을 위한 패딩) 아무튼, 저의 첫 업무는 무제한 박스 만들기였습니다. 별도의 작업대는 따로 없었습니다. 바닥에서 만들면 허리가 아프니 대충 상자가 높게 쌓인 곳에서 만들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역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는 물류캠프의 정신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테이프가 문제인지, 박스가 문제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테이핑을 하는 저의 손이 문제인지, 박스 테이핑 하는 일조차 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제 옆에서 하시는 다른 분께서는 속도가 매우 빠르셨는데, 제가 1개를 만드는 동안 3개를 만드시더군요. 괜한 초조함이 들어 속도를 높여볼까? 손목을 빠르게 돌렸지만, 이내 멈추었습니다.

조급해하지 말자, 조급해하지 말자. 이건 컴페티션이 아니야!!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저만의 속도로 박스를 열심히 만들다 갑자기 다른 작업대로 불려 갔습니다. 그곳은 패킹. 즉 고객에게 물품이 나가기 전 마지막 단계인 출고작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는데요. 제 몸집만 한 박스를 만들다가 두 손으로 감싸지는 작은 박스에 테이핑을 하니 한결 쉬웠습니다. 송장에 붙은 상품 내역(개수)과 실제 박스에 들어있는 개수가 맞는지 확인한 뒤, 비어있는 틈에 완충제를 넣어 테이핑을 하면 끝! 인 간단한 작업이었습니다만, 쉬지 않고 밀려오는 박스에 이성을 잃을 뻔한 위기도 있었습니다. 와, 이거 쉽게 봤다. 내가 쉽게 봤어. 집으로 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던 그때였습니다.



"쉬었다 해요. 안 쉬면 일 못 해."

작업 반장님께서 쉬는 시간이라며 하던 거 다 내려두고 얼른 가서 쉬라고 등을 떠미셨습니다. 지금 안 쉬면 오늘 끝까지 일 못 한다는 말을 안고 휴게실에 들어가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물은 노동 후 먹는 물이었습니다. 이 맛에 다들 일하는 거겠지요?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난 뒤, 다시 작업을 하다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편의점에서 한강라면을 먹었습니다. 사실 이때는 정말 물이 한강인 라면을 먹었대도 너무나 행복했을 것 같은데, 물이 딱 알맞은 라면을 먹으니 온 세상에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꿀맛 같은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네. 출고 작업을 이제 1시부터 6시까지. 그러니까 5시간. 그러니까 그러니까 300분 동안 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매우 지난하고 외로운 과정이었습니다. 물류센터에는 왜 시계가 없을까요? 왜 저는 시계를 차고 오지 않은 것일까요? 시간감각을 느끼며 살았던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시계를 발명하신 분의 후손은 어떤 시계를 차고 계실지 등등에 상상을 더하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력 훈련까지 동시 진행 가능하여 만족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몸을 써서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럼에도 일은 단순하고 쉬워서 좋았습니다.



"퇴근하세요"

퇴근하라는 말 한마디에 정신없이 움직이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빠르게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작업 공간에 들어올 때와는 확연히 다른 걸음걸이와 속도, 그리고 묘한 해방감이 느껴지는 표정들.


오늘 이 캠프에서 한 일은 단순했습니다. 박스를 접고, 물건을 확인하고, 테이핑을 하는 일.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를 보내고 나니 이곳은 단순히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제 사고를 단순하게 만드는 곳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개를 돌리면 묵묵히 일하던 동기 훈련생들이 있었고, 쉬는 시간을 엄격하게 지켜주던 반장님 덕분에 덕분에 오늘의 훈련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 문자가 옵니다.

"내일도 출근 가능하신가요?"

당연히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점도 많았지만, 내일은 쉬어야겠다 생각했거든요.

"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96,000원 곱하기 2를 해보니 꽤나 큰돈이 제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첫 번째 물류캠프를 통해 저의 솔직한 욕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돈이 좋습니다. 같은 가격에 사이다제로 2개/밀키스 1개 중에서 늘 전자를 택하는 절약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지만, 솔직히 돈이 많았다면 전 언제나 밀키스와 함께 했을 것입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밀키스를 사 먹을까? 생각했지만 이렇게 힘들게 번 돈을 곧바로 쓰려는 대범함은 아직 갖추지 못한 저더군요.


대신 내일 마주하게 될 96,000원을 떠올려 봅니다.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역시 저는 돈이 정말 좋나 봅니다. 앞으로, 어떤 캠프에 입소하든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첫 번째 수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급: 96,000원

오늘의 훈련: 박스 접기, 박스 테이핑

물류캠프 입소 한 줄 평: 입소도 쉽고, 일도 쉽다. 하지만 힘들긴 하다.

오늘의 깨달음: 나 돈 좋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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