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고백의 순간
2018년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나는 지금의 남편 백을 처음 만났다. ㅇㅇ역에서 만난 우리.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며 내 정수리 냄새가 나지 않을까 긴장이 됐던 그날, 나는 백을 본 지 3시간도 안 되어 결혼각을 잡았다.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곧장 다음 약속을 잡았고, 닭발을 뜯고 한강을 가고 부지런히 백을 만나 웃고 떠들었다. 근데 분명 이제 고백을 할 타임이 됐는데, 백은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오늘도 재미있었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내가 개그맨도 아닌데 맨날 재밌다고만 하넼ㅋㅋㅋㅋㅋ"라는 나의 말에 백은 그다음 날 바로 우리 동네로 왔다. 그날이 7월 27일, 동네 샤부샤부 집에서 밥을 먹고 우리는 자연스레 공원으로 걸어갔다. 그래, 조용한 카페에서 고백을 받으면 너무 시선집중이 될 테니까, 공원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공원에 도착. 채선당 마감시간이 9시고, 공원에서 엉덩이를 뗀 게 11시 30분쯤이었으니 우리는 그 모기 많고, 개더운 공원에 앉아 2시간 30분을 떠든 셈이었다.
회사 얘기, 가족 얘기, 친구 얘기까지 다 했는데 정작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백을 보며 생각했다. 한 번도 이성을 만나 본 적이 없다더니만, 고백도 되게 굼뜨네? 아 그냥 내가 사귀자고 해버려? 쿨하고 화끈한 상여자의 본때를 보여줘야 하나?
"나랑 사귀자!!!"라는 말을 뱉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내 입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는 듯했다. 말을 뱉으려고 하면 꼭 누군가가 내 입을 꾸욱 막는 것 같았다. 참말로 답답하고 답답한 상황.
곧이어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백의 찢어진 청바지 사이에 삐져나온 털을 보며 멍을 때릴 때쯤, 백은 말했다.
올 것이 왔다. 이제 내가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너는?"하고 물으면 백이 "나도, 우리 오늘부터 사귈래?" 하면 끝날 일이었는데 나의 대답은 이랬다.
"음.. 거슬리는 건 없는 거 같아."
탄식이 나오는 답이었다. 뭐지? 나 왜 모쏠 같지? 왜 내가 더 모쏠 같지? 나는 아무래도 백에게 고백을 받는 게 오글거려 못 견디는 사람같이 굴었다. 백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아 나쁘지는 않는구나..."라고 하더니 그나마 열렸던 입이 꾹 닫혔다.
"고백했어? 뭐래 뭐래?" 하는 친구들의 연락이 줄기차게 오는 카톡창을 바라보며, 나는 모든 걸 내가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정면돌파를 하기로 했다.
이미 마을버스가 끊긴 시각, 백은 내게 집에 데려다주어도 되냐 물었고 난 곧장 어어어 어 데려다주라고 적극적으로 답했다. 이제 10분 뒤면, 5분 뒤면 우리 집 앞에 도착한다. 10분 뒤 백의 고백을 받는다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려 머리가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집 앞에 도착했는데 백은 역시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아우 답답하다 답답해, 너도 넌데 나도 나다.
"나 이제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가야 돼."라는 말을 하고 백을 앞질러 걸었을 때, 내 뒤에서 백이 말했다.
"그래 좋아!" 자판기에서 지폐를 뱉어내는 정도의 속도로 나는 답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달 사진을 찍고 안녕 다음에 봐하는 말을 뒤로하고 집으로 튀었다. 내 크고 긴 귀가 빨개진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요동쳤다. 집에 오자마자 냉수를 들이켜고는 찬물로 세수를 했다. 마치 처음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처럼, 들키면 안 되는 일이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거슬리는 게 1도 없던 백은 사귀면서도, 그리고 결혼을 한 지금까지 크게 거슬리는 게 없이 잘 살고 있다.
그리고, 2020년 7월 27일. 우리는 거슬리는 게 없던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채선당에 방문했다.
여전히 야채를 좋아하지 않고, 성질이 급한 탓에 고기를 한 번에 집어넣는 우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맛있게 먹고, 웃으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모태솔로가 고백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음, 상대방에 따라 짧을 수도 있고 길어질 수도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