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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을전하는남자 Jun 10. 2024

카야노야, 위기의 간장사업이 브랜드의 밑바탕이 되다.

라이프스타일변화와 위기에서 발견한 간장사업의 재발견,  브랜드를 키우는

라이프스타일변화와 위기에서 발견한 간장사업의 재발견, 

브랜드를 키우는 밑바탕이 되다.


카야노야를 만든 쿠바라 식품그룹은  120년 전에 작은 양조장으로 시작해 드레싱부터 ‘카야노야’라는 다시 브랜드까지 만드는 회사로 성장했다. 아지노모토, 기꼬망, 닛신처럼 한국에 널리 알려진 회사는 아니지만, 이 과정을 이끈 건 4대 사장 카와베 테츠지 사장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카와베 테츠지 사장이 회사에 입사한 1978년. 간장은 사양사업 중 하나였다. 그 당시 쿠바라는 간장을 병입해 집집마다 배달하는 간장회사였다. 물론 그 당시 쿠바라는 후쿠오카에서 60%라는 높은 점유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간장의 매출이 대부분 가정에 나온다는 점. 대량의 판매처가 없다는 점은 쿠바라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많은 가정집들은 이미 사용하던 간장을 쉽게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성장이 한계에 봉착할 것은 눈에 보였다. 게다가 쿠바라간장은 타업체보다 가격도 비쌌다.


그는 쿠바라가 가진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가정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교외에 있는 레스토랑, 가락국수, 라멘집들이 주요 대상이았다. 가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영업을 하면서, 그는 만두와 낫또에 들어가는 소스를 만드는 일이 쿠바라의 돌파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고도성장기였고,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은 변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반조리식품의 성장 및 슈퍼마켓 반찬코너가 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간장회사들은 소스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70년대의 일본 슈퍼마켓. 70년대는 일본의 고도셩제 성장기. 즉,라이프스타일이 급격하게 변하던 시키였다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변함에 따라, 작은 사이즈의 소스수요는 점점 늘어났다. 카와베사장은 교자만두소스 OEM으로 회사매출을 성장시켰다. 당연히 회사규모도  커졌다. 카와베사장의 생각이 옳았다. 회사가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날  그는  한 직원의 말을 들었다. ”소스를 만드는 건 하청이에요. 지금은 회사가 성장하는 모습으로 보일지 몰라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거잖아요?”. 카와베 사장은 머리에 뭔가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그 역시도 생각했던 부분이자 외면하고 있었던 현실이었다. 그는 결심했다. ‘우리만의 브랜드를 만들자.’ 카야노야의 시작이었다.


후쿠오카를 기반으로 ‘브랜드’를 만들다.‘

카야노야가 선택한건 OEM이 아닌, 자신만들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 남의 물건을 만드는게 아닌 스스로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 곰곰이 고민하고 있던 카와베 사장은 ’ 후쿠오카'를 생각했다. 그는 쿠라라만 브랜드를 생각하는 와중에도 드레싱 등에 도전했지만 생각만큼 잘되지는 않았다. 그중에서 명란이 떠올랐다. 후쿠오카는 명란으로 유명했다. 백화점이나 기념품 코너에 가면 많은 상품이 판매되고 있었지만,‘브랜드’ 힘이 있는 명란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홋카이도산 명태가 급감했다. 

일본산 명란의 원가가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카와베사장은 일본산 명란에 쿠바라의 간장을 베이스로 엄선한 다시마, 고춧가루로 만든 특제 양념에 명란을 절여 ‘쇼보안’을 만들었다. 상품성은 좋았다. 사람들한테는 호평이었다. 그러나 9년간 적자를 면치 못했다. 원가가 높다 보니 백화점과 면세점에서 판매로는 이익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높은 원가가 문제였다. 원가를 내릴 수 없다면? 유통을 손봐야 했다. 이러한 고민 끝에 나온 해결방안은 ’ 본점’을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쿠바라는 ’ 쇼보안’을 후쿠오카시의 이와타야 백화점과 후쿠오카 공항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임대료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만일 본점을 만든다면? 이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쇼보안’은 쿠바라간장본점에서 판매해 임대료를 아꼈다. 또한 인터넷 판매도 시작했다. 그 후 ‘쇼보안’은 1994년 론칭 후 2004년 만에  흑자 브랜드가 되었다. 그는 그다음을 생각했다. 역시 후쿠오카였다. 후쿠오카에서 야키토리 포장마차에 들어가면 맥주를 한잔 마시면서, 양배추를 소스에 찍어 먹으면서 야끼도리를 기다린다. 이게 후쿠오카 식이다. 그는 이것에 착안해 양배추소스를 만들었다. 이것도 역시 대성공을 거두었다.

쿠라바그룹은 유통방식을 바꿈으로써 적자위기를 타계했다. 그 기반에는 확실한 물건의 품질이 있었다.

카와베 사장은  그 다음을 생각했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무첨가 소스’ 그렇게 태어난 게 가야노야다. 하지만 그 소스가 ‘다시 국물’로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카야노야의 시작은 레스토랑이었다. 쿠라바는 2005년 후쿠오카 시내에서도 한참을 들어간 시골의 어느 산속에 짚을 사용한 옛 방식으로 만든 레스토랑인 ‘카야노야’를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제철 재료를 이용하여 재료맛을 살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레스토랑 카야노야가 오픈했을 당시에는‘콘텐츠’가 주목받던 시기가 아니었다. 카와베 사장이 카야노야를 만들게 된 이유는 오이타현의 인기 온천지 유후인이었다. 그 당시 유후인에는 옛 가옥을 리모델링해 만든 여관들이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쿠라마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카야노야였다.

후쿠오카에 위치한 카야노야 레스토랑. 이곳에서 만들던 국물이 카야노야라는 국물 브랜드로 발전하지는 그 당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카야노야에서 다시 브랜드 ‘카야노야’가 나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카야노야를 찾던 사람들은 이곳에서 만든 다시. 즉, 국물맛을 너무 좋아했다. 어떻게 국물을 만드는지 물어보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카야노야 다시'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레스토랑에서만 팔았는데, 점차 수요가 늘어가면서 일본 전역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홍콩까지 판매하게 되었다. 현재 카야노야는 홍콩을 포함해 싱가포르, 대만, 미국으로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카야노야는 매장을 만들기보다는 카야노야라는 쿠라바의 레스토랑과 인터넷에서 판매를 시작한 브랜드다. 2005년부터 인터넷판매로 시작해 매장을 천천히 늘렸다. 2017년이 되어서야, 인터넷판매가 전체매출의 40프로, 오프라인판매가 60프로가 되었다. 그들이 여기서 주목한 건 ‘고객경험’이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채널을 연결하는 균형감과 고객 경험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쿠라바그룹은 ‘쿠라바’가 아닌 ‘카야노야’ 그 자체의 제품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은 이를 위해서는 고객과의 관계성을 더욱 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관계가 ‘유통’에서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카야노야’가 매장에서 접객과 상품에 집중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유통에만 집중하만 유통기한에 집중하게 되지만, 직접 매장에서 판매하면 유통기한이 짧아도 상품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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