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앤디 파트 먼트 서울by MMMG
며칠 전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에서 본 한 문장이 생각났다.
'지난 기억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감추어둔 보물의 세목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지금 시대에 시간이 지난 후에도 오랫동안 사용하는 디자인을 만드는 일은 모험이다. 제품은 상향 평준화되었다. 소비자의 눈은 그 어느 시대보다 높다. 사람들이 환호성 할 디자인을 만들지 못하면 주목받지 못하고 소리 없이 사라진다. 또한 '일상 속 불편함'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아이디어가 아니라면 살아남기도 쉽지 않다. 공들인 디자인도 매일 쏟아지는 디자인에 밀려나기 쉽다.
디앤디 파트 먼트는 롱 라이프 디자인을 생각하고 전하는 곳이다. 롱 라이프 디자인(Long Life Design)이란 긴 생명을 지닌 디자인, 유행이나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보편적인 디자인을 말한다. 그렇기에 판매하는 물건을 고르는 일에 생산 연대나 브랜드, 신품·중고품 등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요즘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디앤디파트먼트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공감하는 이들에게만 지점을 허락한다.(이하 디앤디) 디앤디는 '매뉴얼 준수'를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디앤디 지점을 만들고자 하는 이의 관점도 존중하기 위해 ‘바이(By)’라는 표현을 쓰게 한다. 게다가 최소 6개월 정도의 오랜 기간 동안 디앤디 본부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지점을 만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롱 라이프 디자인을 찾는 일은 '완결'이 아닌 '진행형'이기에 'project'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같은 노력은 가게 이름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디앤디는 직영으로 하는 도쿄와 오사카지점을 제외하고는 ‘D&Department project by (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명칭을 해석하면 ‘디앤디파트먼트가 추구하는 디자인 철학을 공유하는 아무개'라는 뜻이다. 이걸 다시 해석하면 ‘롱 라이프 디자인 철학에 공감하는 아무개의 가게’다.
디앤디 서울분점 정식 명칭은 D&DEPARTMENT SEOUL BY MILLIMEETER MILLIGRAM'이다. 이를 해석하면 '롱 라이프디자인 철학에 공감하는 MMMG의 가게입니다.'다. 그렇다면 우리가 디앤디파트먼트 서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MMMG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MMMG 홈페이지에서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밀리미터 밀리그램이라는 이름은 작은 차이를 중요히 여기고 작은 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심한 배려가 담긴 물건들과 만나는 기회, 우리 삶의 순간순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부터 하나씩 디자인하고 만들어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MMMG의 가치관은 디앤디 추구하는 롱 라이프 디자인과 상응한다는 걸 알 수 있다. MMMG가 추구하는 가치는 롱 라이프디자인이라고 해도 무관할 정도다. 마찬가지로 디앤디 서울점은 다른 디앤디 매장 와 마찬가지로 일본 전역은 물론 세계에서 수집된 롱 라이프 디자인을 선보인다. 일본 내 디앤디와 차이가 있다면 일본 지역점은 일본 각 지역에 집중하지만, 서울점은 해외 매장이다 보니 일본과 한국의 롱 라이프디자인을 둘 다 소개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서울점에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한국 전통 공예품, 특산물, 재활용 상품 등을 발굴해 '한국의 롱 라이프 디자인'이란 제목으로 소개한다.
롱 라이프 디자인을 '전하는'가게가 모토인 디앤디파트먼트는' 상품 판매'만 하지 않는다. 다른 디앤디 지역점과 마찬가지로 상품과 생산자에 대한 이해 폭을 넓히는 공부회인 디스쿨(d-SCHOOL) 프로그램을 연중 운영한다. 이를 위해서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공부회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전화번호 및 메일 주소를 적는 종이를 비치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디스쿨에 대한 정보를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다.
디앤디가 상품을 고르는 기준 중 ‘20년’이라는 시간이 있다.(나카오카 겐메이 본인이 저서에 그렇게 써놓았다.) 왜 '20년'일까? 내가 볼 때 '20년'은 한 세대가 성인이 되는 시간이다. 더불어 그 세대가 새로운 소비층으로 자리 잡는 기간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밀레니얼 세대다. 나는 1985년생이다. 2019년을 기준으로 '20년'을 생각해보자. 1999년이다.
1999년은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시절이다. 나는 '디앤디' 서울을 찾아가면서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디자인을 기대했다. 아쉽게도 내가 기대한 만큼의 디자인을 디앤디 매장에서 충분히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녹색 플라스틱 용기, 팬텔 볼펜, 말표 구두약만으로도 20년 전을 기억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특히 중등학생 시절 학교 근처 분식점에서 자주 보던 녹색 플라스틱 용기는 무척 반가웠다. 물론 지금도 몇몇 분식점에 가면 녹색 플라스틱 그릇에 음식을 준다. 그 반가움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추억을 함께 먹는다고 해야 할까?'20년'을 기억할 수 있는 상품은 충분했다.
디앤디파트먼트 서울점의 상품 카테고리는 크게 두 가지다. '월드 스탠더드'와' 코리아 스탠더드'. 디앤디 지역점의 상품 구성은 본부가 선정한 공통의 롱 라이프 디자인을 따르는 '월드 스탠더드'. 해당 지역 특산물 중에서 선정한 독자적인 롱 라이프디자인 상품을 각 각 절반씩 취급하도록 한다. 디앤디 서울점은 해외 1호점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한국 내에서 '월드 스탠더드'에 견줄만한 상품 발굴이 가능한 경우 국내산 상품으로 대체하거나 함께 소개한다. [2호점은 제주도에 있다.]
모든 디앤디 지역점은 해당 지역에 기반을 둔 롱 라이프 디자인 상품을 선정해 그 지역의 '셀렉트 상품'으로 소개한다. 서울점도 예외는 아니다. '코리아 셀렉트'라는 상품군으로 한국 내 롱 라이프 디자인 상품을 선보인다. 이 같은 지침의 영향으로 가게에서는 다수 '디앤디'본부 기준에 에 부합하는 일본산 제품이 상당히 많다. 이를 반영한 디앤디 오리지널 상품도 존재한다. 만약 '서울에서 발견한 롱 라이프 디자인'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품고 왔다면 실망할 가능성도 크다.
지금 시대는 각 나라마다 산업이 분업화되어있다. 2019년 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차원에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재한 조치와 함께 나온 표현은 '글로벌 시장의 분업화'다. '글로벌 시장의 분업화'는 제품 디자인에도 당연히 영향을 주고 있다. 아이폰만 해도 디자인은 애플 본사에서 하고 부품은 한국, 대만,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조달하고 최종 완성은 대만에 위치한 폭스콘에서 만든다.
'글로벌 분업체계'에서 만들어진 상품 디자인은 전 세계에서 판매된다. 상품 자체가 전 세계 판매가 목적이기에 제품 디자인은 '로컬' 보다는 '글로벌'에 중점을 둔다. 어떻게 보면 전 세계인이 동일한 디자인을 사용하기 때문에 좋을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면에서 본다면 글로벌 디자인이 확장되면서 '로컬 디자인'에 대한 발견이 줄어둘 수 있다. 전 세계에 어디서나 좋은 디자인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로컬 디자인에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없다. 더 좋은 가격으로 더 나은 디자인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한국인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랑받은 생명을 지닌 디자인. 유행이나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한국인들이 사용해온 보편적인 디자인이 있다. 디앤디 서울점은 이 같은 부분에 집중해, 한국과 서울의 롱 라이프 디자인 상품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소개하려고 노력한다. 대나무가 유명한 담양의 죽제품, 국제 아피스 공업사가 만든 만년필이 대표적인 예다. 옛날부터 오랫동안 만들어지고 계속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매력이 젊은 세대에 충분히 전달되고 있지 않은 상품을 발굴하고 판매하며 상품의 기술, 매력, 역사, 생산자를 소개한다. 디앤디 서울 매장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조선유기공방도 마찬가지다. '코리아 셀렉트' 상품 이외에도 식품류 등의 신규 카테고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 물건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현재 서울점 매장에 판매하는 쫄깃 국수, 숙성간장, 전통주가 대표적인 예다. [2019년 기준.]
롱 라이프디자인은 '기능'을 넘어 기억을 만든다. 펜텔 사인펜이 대표적인 예다. 나는 이 제품을 보고 오히려 파이롯트 펜이 생각났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기 파이롯트 볼펜은 다들 한 번쯤 큰 마음먹고사는 제품이었다. 20년 전 1개당 2000원이나 했던 파이롯트 볼펜. 큰 맘먹고 파이롯트 볼펜을 구매한 친구들은 볼펜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단순히 파이롯트 볼펜이 비싸서만 애지중지한 게 아니었다. 파이롯트 볼펜은 얇은 펜촉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바닥에 떨어지면 잉크를 조절하는 공이 쉽게 빠져버렸다. 잉크량을 조절하는 공이 떨어지면 볼펜에서 잉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볼펜을 쓸 수 없었다.
종종 파이롯트 볼펜을 구입한 날 실수로 펜을 떨어뜨린 친구들도 몇몇 있었다. 다행히 볼펜 촉 볼이 떨이지지 않은 친구도 있었지만, 볼이 떨어진 친구들은 눈물을 머금고 펜을 버렸다. 종 종 그걸 고치는 금손들도 있었다. 볼펜 촉 볼이 쉽게 떨어지는 파이롯트 볼펜 구조 때문에, 종종 펜을 세게 책상에 치는 시늉을 하면서 볼을 빠지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녀석도 있었다. 이처럼 롱 라이프디자인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추억을 만든다. 추억을 만든다는 점에서 트렌드 한 디자인과는 다르다. 물건이 상향 평준화되는 요즘 시대에 물건은 그 무엇보다 빠르게 소비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니까.
디앤디파트먼트 서울에서 보는 물건은 화려하지도 심미적이고 않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 제품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먹는 물컵, 집에 오면 항상 앉는 의자들,지금도 종종 볼 수 있는 떡볶이 접시 평범한 사기그릇이다. 우리 삶을 떠받치는 일상이다. 오히려 물건을 보며 그 디자인을 보고 그 의미를 찾는 일이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시간이 지나지 않고도 계속 사용하는 디자인이 꼭 애플처럼 심미적일 필요는 없다.
매년 출시되는 스마트폰들은 한결같이 이쁘다. 그렇지만 그 스마트폰들이 지속 가능한 디자인이 될지는 20년은 지나야 확인해볼 수 있다. 디자인의 가치를 겉이 아닌 시간에 두는 건 모험이다. 다들 예쁘다고 할 때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밀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디앤디 서울 매장은 총 지상 3층과 지하층이다. 1층부터 3층까지는 앤트러사이트 커피가 입점했다. 지역별 디앤디 매장에서 카페를 입점시키는 걸 권유하는 걸 생각한다면 당연한 조치다. 앤트러사이트 홈페이지에서는 앤트러사이트 이태원점을 대대적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합정점을 소개하면서 적은 다음과 같은 문구는 앤트러사이트 역시도 디앤디, MMMG와의 교차점을 찾아볼 수 있다.
" 앤트러사이트 합정점은 구조적으로 아름다움을 되찾는 소통의 공간이며 커피공장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멈춰진 공간 속에 시간을 넣고, 그 변화와 축적을 공유하는 것. 낯설지만 모두에게 닿을 수 있는 부분을 찾고자 합니다"
건물은 옛 이태원과 한남동 건물 느낌이 남은 낡은 건물이다. 나의 작은할아버지가 경리단길에 사셔서 어릴 적 한남동과 이태원을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느꼈던 어린 시절의 감성. 딱 그 느낌이었다. 또한 건물구조가 매우 신기하다. 디앤디 서울이 입점한 빌딩 앞에는 디앤디가 지하 2층에 있다고 안내한다. 그렇지만 프라이탁 매장에서 디앤디 서울점을 가면 지상 2층 같다. 창문까지 있으니까. 낡은 건물과 모던한 디자인은 앤트러사이트, MMMG, 디앤디 파트 먼트, 프라이탁까지 일관적으로 이어진다. 특히 디앤디와 MMMG는 철학도 비슷하기에 매장 디자인, 조명, 아이맥 활용까지 이어지는 맥락이 모두 동일하다.
빌딩 일부는 골목길에 그대로 노출되어있다. 빌딩 앞에서는 프라이탁이 지하 3층이라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빌딩 뒤 한남오거리로 가는 내리막길에서 보면 프라이탁은 지상 1층이다. 낡은 건물 내 공존하는 과거와 현재'의 감성은 디앤디 파트 먼트, MMMG, 앤트러사이트가 추구하는 가치를 모두 담아내는 최적 공간이다. 일부러 찾아야만 비로소 발견하는 공간 속 디테일들. '낯섦과 친숙함'이다.**도로에서 보면 지하 2층이 건물이 골목길에서 보면 지상 2층으로 바뀐다.
며칠 전 구매한 지 10년 정도 아이맥 G5를 보았다. 몇 년 전 수명이 다하기 전까지면 해도 열심히 사용하던 제품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것저것 익히던 시절 내가 의지할 수 있던 유일한 물건이 아이맥 G5였다. 호환성이 부족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최신형 맥북과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편하게 사용했던 녀석. 사용하지 못하는 아이맥을 계속 가지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아이맥 디자인이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우리는 '전함'보다 '판단과 비평'을 우선시했다.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너무 쉬워졌고 '관계'는 어떤 면에서 더 '가벼워'졌다. 어쩌면 이미 '전하다'라는 말마저도 진부해졌을지 모른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디자인이 아니라 디자인 속에 있는 '전함' 일지 모른다.
MZ세대는 아날로그보다는 '디지털'을 먼저 경험한 세대다. 그들에게는 디지털이 먼저다. 아날로그는 나중이다. 디지털로 먼저 확인하고 직접 가서 보고 만져보는 게 그들의 특징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게 지금 세대의 방식이다. 디지털 중심으로 변한 사회 때문에 '아날로그'가 소외받아서 아날로그가 주목받는 게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로 본 사진들을 직접 만져보고 싶은 욕망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직접 보고 만지고 싶은 욕망을 디지털 기술이 더 촉발한다고 해야 할까?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이왕이면 검색으로 찾은 멋진 걸 보는 게 더 효율적이니까.
한남동에서 본 많은 젊은 이들은 낡거나 혹은 지저분한 한남동 거리를 사진에 담고 있었다. 아마도 그 사진들은 소셜미디어로 올라갈 테고 어떻게 되들었는지 기억 속에 계속해서 남을 거라 생각했다. 롱 라이프디자인은 시간을 초월해서 사랑받는 디자인이지만 진정으로 디자인을 사용하고 기억하는 건 역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