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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을전하는남자 Nov 19. 2019

독학:자존감을 찾아가는 과정.

나에게 독학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자. 자존감을 찾는 일이었다.

나나 내 형이나 가게는 처음이었다. 누구나 처음은 어디서 시작할지 모른다. 일단 시작을 하고 뭐든지 하면 된다. 리모델링도 처음. 재무, 세무, 회계 모두 처음이었다. CFA를 공부하면서 배운 내용들. 주식 벨류에이션, 채권 듀레이션과 컨벡서티 계산은 하나도 쓸모없는 일이었다. 카페를 시작한 이상 독학을 해야 할 내용은 문명 했다. 우선 그동안 아낀 재무, CFA책을 모조리 버렸다. 무엇인가 새로운 상황이 되면 기존에 있던 것들을 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뒤돌아서지 않을 용기도 필요하다. 자신이 그동안 너무나도 좋아해고 사랑했던 존재라면 더더욱 그렇다.


독학이라고 하면 느긋하게 해야 할 거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정말로 진지하게 해야 했다. 낮에는 일을 하면서 틈이 나면 짬짬이 책을 보았다. 집에 오면 유튜브를 보았다. 독학을 하면 가장 힘든 건 누군가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고 지도해줄 사람도 없다는 점이다. 사수도 없다. 누군가는 사수를 잘 만난다고 해야 하지만 나는 사수란 게 없었다. 나는 사수가 있는 사람들은 부러웠다.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정말 외로웠다. 물어볼 사람이 있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물어볼 사람도 없이 독학을 시작하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얼마나 통제를 하느냐다. 내가 브런치에 사진이나 영상을 넣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누군가 사수 없이 외롭게 독학을 한다면 내 글이 조금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난 너무 힘들었고 외로웠다.

베이킹 레시피 책은 게다가 너무 비싼 편이었다. 글쎄 내가 가장 처음 만든 건 리코타 치즈였다. 리코타 치즈를 만들고 나서 브리오슈 번, 캐러멜 양파, 마카롱, 에클레어, 구움 과자, 초콜릿 아이스크림 이런 식으로 범위를 늘렸다.


누군가에게 이걸 독학을 익혔다고 하면 신기해한다. 누군가에게 신기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정말로 생존이 걸린 일이었다. 나는 치즈를 만들면서 1년 동안 저온성 화상에 시달렸고 커피는 하루에 10잔은 마셨다. 출근시간에 시간을 맞추느라 몸도 힘들었다.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신경은 날카로워졌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모든 게 어설펐다. 가게에서 본 내 모습은 진짜 내 모습이었다. 얼굴은 항상 부었고 눈은 항상 풀려있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교통사고도 당했었고, 자전거를 타다가 공중에서 돌기도 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밥 먹는 건 익숙했다. 졸리면 그냥 가게 바닥에서 잤다. 한동안 페이스북 계정도 비활성화했다. 해외 가고 회사에 다니면서 취미생활도 하는 친구들과 비교하면 난 너무 초라했다. 특히 가게를 처음 연 2013년부터 2016년 8월까지 지독하리만큼 자존감은 바닥을 찍었다. 하지만 바닥을 찍으면 그만 틈 새로운 자존감이 차오르기 마련이다. 적어도 나에게 그 시작은 리코타 치즈였다. 리코타 치즈는 2013년 11월에 완성했지만 리코타 치즈가 그리 바닥을 치던 내 자존감을 살렸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2년 6개월 정도가 걸렸다.

2012년부터 리코타 치즈는 브런치에서 주목받던 메뉴였다. 카페 마마스가 히트 친 리코타 치즈와 청포도 주스는 엄청난 인기였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리코타 치즈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카페 마마스에서 나온 시 리코타 치즈를 비롯해 시중에 나온 리코타 치즈를 모두 먹었다. 뿐만 아니라 우유, 레몬즙은 다 먹어보았다. 또한 치즈를 만들면서 형이 나에게 가르쳐준 연구실 방법론은 내가 무엇인가 만드는데 기본적인 룰이 되었다.


"수치를 잡을 때는 변수를 일단 극단으로 잡아. 그다음에 줄이기 시작해" 그나마 나에게 사수가 있었다면 형정도 였다. 그렇지만 완전한 사수도 아니었다. 형도 독학하느라 바빴다. 서로 바쁘고 예민했다. 형은 대표로서 받은 압박감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다. 대표가 아닌 대표 아래 있는 압박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각종 인쇄물도 독학으로 배웠다. 포토샵, 인디자인, 일러스트레이터, 모두 독학으로 익혔다. 돈도 부족했다. 카페를 오픈하고 1년간은 월급을 받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든지 가게를 자리 잡고 살아남느냐가 중요했다. 독학이라고 해도 퇴근하고 난 뒤에 1,2시간이 전부였다. 피곤이 몰려오지만 참았다. 어쩔 때는 퇴근할 때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공부했다. 카페를 유지하려면 음악도 언제나 최신 트렌드를 알아야 했다. 음악도 엄청 들어야 했다. 그나마 나에게 위안이 된 건 음악이었다. 적어도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를 하는 건 좋았으니까. 나에게 독학은 '이거 배워야지!'가 아닌 생존의 문제자 자존의 문제였다. 가게에서 일을 하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머릿속으로 만드는 방법을 기억했다. 

화장실에서는 스마트폰에 저장한 영상을 보면서 감을 익히려고 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배움을 청할 사람, 시간, 돈도 모두 부족했다. 독학이라도 가게일에 방해가 되면 안 됐다. 노트를 손에 들고 다니면서 아이디어나 레시피를 적었다. 브런치에 글을 적 고난 뒤에는 브런치에 쓸 문장도 적었다. 지금은 도쿄에 건축, 미감, 서비스 기획, 풍경, 에세이등을 쓰지만 처음에는 도쿄 자료에 대한 필기에서 시작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나도 도쿄에 대해 상세하게 적을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억해보면 치즈를 만드는 데는 6개월 정도가 걸렸다. 결론부터 만들자면 리코타 치즈는 나쁘지 않았다. 나름 가게를 북카페에서 브런치카페로 선회하는 계기를 만들게 된 것도 리코타 치즈 덕분이었다. 리코타 치즈를 이용한 브런치를 출시하면서 나는 매일 리코타 치즈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얼마나 팔릴지 몰라서 조금씩 만들었다. 처음에는 리코타 치즈를 사용한 샐러드가 잘 팔리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씩 매출은 늘어났고 그에 맞게 매일 만드는 치즈량도 늘었다. 동시에 레시피도 계속 수정했다. 레시피 완성까지는 대략 3년이 걸렸다. 보통 1년은 레시피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2년 차는 1년 차에 몰랐던 문제들을 모조리 해결하는 순서다. 3년 차가 되면 1,2년 차에 겪지 못한 다양한 문제들을 접하고 이에 대처한다. 항상 문제를 대처할 때 가설을 설정하고 그걸 하나씩 검증하면서 대처했다. 내가 형에게 고마워하는 건 이것저것 규칙 없이 하던 나에게 '가설을 세우고 검증한다.'라는 마인드셋을 훈련시킨 거다.

제품을 만들 때는 언제나 유통부터 시작해야 한다. 재료가 떨어지는 모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마지막 경우의 수가 판매를 하지 않는 거다. 나는 치즈를 만지면서 치즈를 넣은 면포를 그냥 만졌다. 내 손은 항상 불그스름했다. 1년 동안 나는 그게 화상 인지도 모른 상태로 일했다. 그냥 참고 다녔다. 알고 보니 저온성 화상이었다. 얼마나 무식하게 일했으면 의사가 나에게 "직업이 뭐냐? 이상태가 되도록 뭘 했냐"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게 건강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치즈는 만드는 건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으니까. 그만큼 내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설거지와 서빙을 하면서 지지리 못난 외피만 가득한 나를 보며 매일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래도 그나마  내가 처음으로 무엇인가 할 줄 안게 생긴 건 리코타 치즈였다. 그리고 그 치즈는 내가 스스로 매출을 올린 아이템이었다. 매일 리코타 치즈 샐러드 가 팔리는 순간은 나의 존재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마카롱을 만들 때는 더더욱 심했다. 마카롱을 만들기로 한 이유는 간단했다. 


가장 어려운 걸 하면 다른 것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마카롱을 만들 본 이들은 마카롱이 기온, 습도, 수분에 얼마나 민감한지 잘 아리라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마카로 주가 되지 않으면 마카롱은 망한다. 원데이 클래스도 가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 거금을 주고 산 반죽기를 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장님 더듬듯이 헤매다가 만난 책이 피에르 에르메가 쓴 The macarons'다  피에르 에르메 책은 나에게는 충격이자 단비였다. 이탈리아 머랭을 사용해서 보다 더욱 단단한 꼬끄를 만들 수 있었다. 지방과 단백질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도 충실했다. 요리와 화학에 대해서 공부하건 마카롱부터였다. 후에 수비드를 공부하면서 더욱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유튜브로 우연히 피에르 에르메 파리 매장에서 직원들이 마카롱을 만드는 걸 찾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을 보았다. 사수는 없었지만 나에게는 책과 유튜브가 그나마 사수였다. 아마도 꼬끄만 8000개를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8000개는 어떻게 했을까? 내가 다 먹었다. 8000개가 망하고 나니 마카롱이 무엇인지 조금 알았다. 1만 개 정도 망치고 나니 꼬끄를 만드는 데 수월했다. 그러나 문제는 수율. 마카롱 수율이 너무 낮자 형은 나에게 더 이상 재료비를 대줄 수 없다고 했다. 그 당시 가게는 죽음의 계곡을 지나가던 시기였으니까. 


그나마 없는 돈을 털어서 재료를 샀다. 다행히도 수율은 점차 좋아졌다. 마카롱은 수율이 중요하다. 수율이 좋을수록 단가를 더 낮게 책정할 수 있다. 나는 르꼬르동 블루나 동경제과학교를 나온 사람이 아니었다.요즘은 유튜브, 인스타로 각종 제품 홍보가 가능하지만, 그 당시에는 아니었다.더욱 골치아픈건 마카롱 가격이었다. 디저트에 관한 어떠한 커리어도 없는 내가 책정한 마카롱 가격을  과연 사람들에게 납득할만수 있을까?


메뉴를 만드는 일과 손님들에게 판매하는 메뉴를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건 리코타 치즈에서 배운 거였다. 손님들에게 판매할 메뉴를 만드는 일은 유통, 마진, 회전율, 고객 동선, 날씨, 행동, 감성, 플레이팅 모든 걸 신경 써야 한다. 당시 마카롱보다 먼저 출시한 에클레어는 반응이 좋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반면에 마카롱은 반응도 신통치 않았고, 수율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만약 내가 가게에서 디저트만 담당한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그 당시 나는 대표에 준할 만 틈의 역량을 가져야 했기에 마카롱, 에클레어는 부가적인 요소였다.오히려 커피와 브런치메뉴에 집중해야했다. 오히려 주력 메뉴인 치즈를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마카롱은 사이드 프로젝트였다.

사실 나의 실상은 너덜너덜했다. 어쩌면 그걸 감추기 위해서 사람들을 피했는지 모른다.

남들은 마카롱, 에클레어 등등 디저트를 만드는 나의 모습이 멋지다고 했지만, 그 당시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갈팡질팡 방황하던 시기였다. 자존감도 여전히 바닥이었다. 나라는 사람. 욕심은 참 많았지만 역량은 따라오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결국 조류독감이 터지고 달걀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마카롱은 가게에서 없어졌다. 마카롱이 다시 디저트로 나온 건 스테이크하우스가 오픈한 후였다.


브런치카페를 운영하다 보니  소개팅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게 왔다. 대다수는 아니지만 회사 커리어가 마치  자신인 것처럼 거들 먹을 피우는 사람도 보았다. 심지어 자신이 어디를 다닌다면서 나를 깔보는 사람도 있었다.많은 이들이 회사의 커리어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물론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들어간 노력이 있기에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생각한다.솔직히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른다.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들인 엄청난 노력을 폄하하는 말처럼 들릴것같아서 매우 조심스럽지만, 이 말만은 하고 싶다. 회사는 단지 그곳에 있을 때 나의 갑옷일 뿐이다.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 완전히 벌거벗은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고.....

내가 있던 가게. 그 가게는 나와 형가족 내외가 만들었지만, 냉정하게 나는 지분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을 가게와 동일시 했지만 동시에 철저한 남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나의 자존이 의지하고 내 존재를 찾을 곳은 가게가 유일했다. 형은 항상 말했다. '넌 가게를 너무 사랑해'. 맞다. 나는 가게를 사랑하고 또 아꼈다.


결국 어느 순간 스스로 독립해야 할 시간이 온다. 

그럴 때 나는 얼마나 자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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