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다루는 드라마는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다.
연적. 연적은 붓글씨를 쓰기 전
벼루에 먹을 갈기 위한 물을 넣는 도구다.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연적만큼은
꼭 볼 만큼 연적을 좋아하는 편이다.
어린 시절 붓글씨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 다녔다.
90년대 중반에는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
서예 학원에 다니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학원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연적에
물을 담아 벼루에 부은 후 먹을 갈았다.
연적으로 물을 조절하며 정성을 다해 만든 먹물을 만든다.
맑은 물이 점차 고운 먹물로 변하면
글을 쓰거나 수묵화를 그렸다.
밝기가 다른 검은색으로 그려진 글이나
수묵화를 보면 참으로 고요한 호수를 보는 듯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먹물을 따로 팔았다.
먹물이 있음에도 학원에서는 먹물보다는
학원에서는 연적으로 물을 넣고 먹을 갈아서
쓰는 걸 가르쳤다.먹물을 만드는 과정.
먹물 그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였다.
연적에 담긴 물을 부어가며 맑은 물이
먹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다면 오히려
먹물이 가진 소중함을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결과물을 보는 일과 과정을 알고 결과물을 보는 일은
같아보여서 큰 차이가 있다. 과정속에는
언제나 유기적인 연결관계를 볼 수 있으니까.
아무리 휘발성이 강하고 수많은 광고들이
우리의 시간을 사로잡고자 하는 지금 시대.
매 초마다 수많은 이미지가 쏟아지는 시대다.
과정보다는 결과다 더 주목받는 건 어쩔수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스스로가 추구하는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을 만드는 과정을 의미하는 과정.
앞에서 말한 연적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드라마는 텍스트를 영상언어로 바꾼 결과물이다.
이를 이해하는 일은 콘텐츠 그 자체를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터와
소비자의 경계에 있기에 이를 이해하는 일은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만든 결과물이 글쓰기 혹은
수묵화라면 텍스트, 영상 요소, 카메라 앵글 등을
이해하는 일은 마치 붓글씨를 쓰기 전
연적에서 물을 부어가며
고운 먹물을 만드는 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멜로 드라마는 연극 형식의 하나다.
과장된 상황 설정이나 대사를 가진 통속적인 연극.
유럽에서 18세기부터 상연된 것으로,
대사와 대사 사이사이에 음악을 끼워 넣은,
오락성이 강한 연극으로 정의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멜로
연애를 테마로 하는 감상적인 연극이나 영화를 말한다.
멜로는 백자 연적이다. 맑고 그 맵시는 날렵하다.
멜로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숲 속으로 걸어가는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그 길은 정갈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멜로드라마는 청춘의 글은 아니다.
정열이나 심오한 철학을 담은 문학도 아니요.
그저 맑은 감정이 흘러나오는 단순한 장르다.
멜로는 보는 이들을 흥분시키지 아니한다.
순수한 '사랑'이라는 마음의 산책이다.
그 안에는 인생 속 향취와 여운이 맴돈다.
멜로드라마의 색깔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도 추하지도 않다.
언제나 온화하다. 멜로드라마의 꽃은
부드러운 진주빛이다.
그 빛깔은 보는 사람의 얼굴에
작은 미소를 띠게 한다.
감정을 다루는 드라마는 차분하며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하다.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보다는 매 사건마다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들이 많기에 배우들은
항상 이를 포착해 연기해야 한다.
매 장면마다 '충분함'을 찾으며
그 충분함이 드라마 장면마다
적정한지 고민하고 걸러내야 한다.
범죄 수사물이나 의학드라마는 감정 흐름이
선명한 편이지만 멜로드라마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갈 수 있는
중의적인 상황이 많다.
중의적인 상황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배우에게 자유를 준다.
동시에 얼마나 균형을
잡는지는 배우가 가진 편집력에 달려있다.
연적안에 담긴 물을 조절하며 먹물을 만들듯 배우는
감정을 조절하며 각 장면에 맞는 먹물.
장면이 추구하는 빛깔에 맞는
감정을 표현해아한다.
그러므로 멜로드라마는 수묵화와도 같다.
.
수묵화 안의 획이 모두 검기보다는
강단이 있듯이 멜로드라마에도
감정의 깊고 진함이 묻어난다.
이 같은 멜로드라마 특징 탓에
'사랑의 온도'는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면들이 많아 감정의 방향이
맞지 않을 경우 수돗물같이
무의미한 장면이 되어버릴 수 있다.
배우가 가진 편집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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