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직장인이 뭐 어때서
요즈음에는 이직이 정말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다들 쉽게 결정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직’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무게감이 가벼워진 것만 같은 느낌은 든다. 내 인생에 있어서 이직은 꽤나 큰 결정이었다. 결혼이나 취업 외에는 스스로 선택한 일이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더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고, 잘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잘해야 해. 잘해야만 해. 그래도 경력직인데….’
하지만 6개월이 지난 시점이 되자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여기도 그다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업종이 조금 바뀌었고, 일하는 환경과 동료들도 달라졌지만, 그뿐이었다.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연봉이야 제법 오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미래가 장밋빛으로 물들 만큼의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그저 대감집 노비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바뀐 기분일까? 그래도 노동자가 낫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거기서 거기다. 결국 내가 월급쟁이로 사는 한, 내 삶의 큰 틀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을 서늘하게 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챌린지를 계속 수용하면서 내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하지만 정작 법적으로 주어진 내 시간인 연차조차도 허락받아야 쓸 수 있는 것이 내가 선택한 월급쟁이로서의 삶이었다. 왜 취업을 하기 전에 이런 것을 생각하지는 못했던 걸까 신기할 지경이다.
특히 하는 일이 바뀐 것 때문에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도 한 몫한 듯하다. 기존에는 프로젝트를 리드하는 업무였는데 이제는 고객을 지원하는 업무다 보니 나의 제품이라는 것이 없어진 것만 같았다. 실물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영향을 끼칠 줄은 정말 몰랐다. 생각보다 내가 상상력이 좋지 않은가 보다.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 나의 오산이었다. 모든 회사가, 모든 업무가 내가 바라는 것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아주 당연한 소리이다. ‘근데 왜 나는 이직을 하고 나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곰곰이 해봤더니 결과는 단순했다. 나는 그냥 회사가 싫은 거다. 아주 무책임하고도 한심한 결론이 튀어나왔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말해봤자 다들 자기도 그렇다면서 동조는 해주겠다만 그래도 다녀야지 라는 말을 할게 뻔하다.
첫 직장에서 힘들었던 것은 2가지였던 것 같다. 첫 번째는 내 모든 시간이 구속되어 버린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예계약은 했지만 만기 이후의 삶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일 테지. 그런데 이게 이직을 한다고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 나의 순수함에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 이게 문제다. 나는 지금껏 다른 일을 해본 적도, 심지어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대학 시절에 10여 종 이상의 다양한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지만 그게 이런 순간에는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렇게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이직이라는 큰 결심을 했을 때 나는 '그래, 나는 성장하고 있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결국 나는 회전문 속에서 계속 앞만 보며 밀기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로 말이다.
하루는 퇴사를 검색해 본다. 그런데 나오는 책들은 퇴사보다는 투자와 부업을 말한다. 다시 현실을 생각해 본다. ‘현실이 힘든데 그걸 넘어서 더 노력해야 한다고?’ 이게 나에게도 가능한 방법일지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그래... 돈 중요하지. 근데 문제는 퇴사하고 싶은 내 마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조언은 지금 내가 벌고 있는 돈이 얼마이고, 퇴사를 할 경우 내가 잃게 되는 돈이 얼마이다라는 것에 초점이 맞혀져 있었다. 돈이 없다면 결국 내가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다.
뭔가를 선택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태어나서 첫 선택이 아빠냐 엄마냐의 문제였다면 (이건 쉽다. 엄마), 점점 나이가 차면 짜장이냐 짬뽕이냐의 문제가 된다. 이것도 괜찮다. 어떤 것이든 먹으면 배부르니까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내가 해왔던 선택 중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선택지는 딱히 없었던 것 같다. 덜 위험한 일을 2개 나열해 두고 선택하는 식이었으니까. 시험지의 객관식 문제를 풀듯이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직장생활은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참 그렇다. 정답을 하나 찾는 게 아니라 수많은 오답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 아주 질 나쁜 선택지만 주어지는 것만 같으니까. 내가 생각한 선택지는 이렇게 2가지이다.
1. 퇴사를 생각하지 않고 버틴다.
2. 퇴사를 생각하면서 버틴다.
퇴사를 꿈꾸지만 현실을 보면서 다시 눈을 감아버리게 된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인가. 잠이나 자자.
새로운 직장은 여러모로 힘든 곳이었다. 사무실에 있으면 숨이 막혔다. 과장이 아니라 (직책은 과장 맞긴 하지만) 한 번씩 숨이 턱 막혀와서 호흡이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헐떡 거리면서도 상반신을 사무실 책상에 기대어 일하기도 했다. 완벽한 아웃사이더로 생활했기 때문에 내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도,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쩌면 내가 아픈 것도 모를지도. (이건 좀 슬픈 일인데?) 혹시나 큰 병으로 이어질까 봐 걱정이 되어서 심장과 호흡기 등의 다양한 병원을 찾아갔지만 역시나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이게 더 스트레스받는 일이기도 하다. 말은 쉽지. 왜 인간은 스트레스 조절 장치가 생기도록 진화하지 못한 걸까?
부장님 자리에서 짜증 내는 소리나 헛기침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했다. 나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괜히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이 맞다. 쓸데없이 잘 들리는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갑자기 부를 수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차피 말로 부를 거면 메신저는 도대체 왜 있는 건가? 이런 사소한 판단조차도 할 수 없어질 만큼 나는 망가져 가고 있었다. 너는 언제 적응하냐는 말을 들었을 때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여기가 마지막 직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몇 년 뒤의 나는, 내 몸은 버텨주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