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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인간 Nov 06. 2021

그와 나의 화해법

얼굴을 보면 웃을 수밖에 없다


 “아~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남편과의 말다툼은 항상 이런 식으로 끝이 난다. 


별거 아닌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말다툼이 일어나면, 남편의 잔소리가 시작되고 나의 귀는 잔소리 폭격에 떨어져 나갈 것만 같다. 더는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니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일단 후퇴하고 본다. 

‘아~ 몰라 몰라! 안 들을래! 어버버버버버~ 안 들린다~ 안 들린다!’


급히 자리를 떠 방으로 가 누워있으면, 아이들이 가만두지 않는다. 특히 엄마가 누워있는 꼴을 못 보는 4살 아이는 이불을 들추고 “영차~ 영차~”하며 내 머리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 

“엄마 5분만 있다가 나갈게~ 나가서 누나랑 놀고 있어.”


통할 리가 없다. 

아이는 “일어나~ 놀자~놀자~!”하며 막무가내로 내 팔을 잡아당긴다. 아이와 씨름하다 보면 어느새 왜 다투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실로 붕어의 뇌인가 싶을 정도로. 그만큼 사소한 것이 원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투고 난 직후에는 ‘다신 내가 너랑 얘기하나 봐라!’라고 마음속으로 외치지만, 그 감정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나쁜 감정은 금세 희석되어 버린다. 그리고 다시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내가 먼저든 남편이 먼저든 서로 장난을 치며 냉랭했던 분위기가 깨져버린다. 다툰 후 화해까지 보통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사실 얼굴을 보면 계속 화난 감정을 유지할 수가 없다. 웃기게 생겨서인 건 아닌데. 아마도 17살에 친구로 만났던 사이다 보니 그렇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나는 그의 소년이었을 적의 모습과 행동과 말투를 기억하고 있고, 우리에게는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한가득이니 말이다. 사랑에 앞서 우정을 다져두었던 사이라서 그럴까.






    

나의 화해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방법은 뾰로통해져 있는 그에게 가서 일단 무조건 끌어안는다. 대부분 그러면 화가 풀리는데, 혹시나 안 풀리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려 한다면 다리에 매달린다. 바짓가랑이 붙든다는 말처럼 움직이는 다리에 매달리는 거다. “난 너 없으면 안 돼~”라는 멘트를 날려주면서. 

그러면 그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지금 생각하니 어이가 없어서인가 싶기도 하다.


두 번째 방법은 남북 정상 회담하듯이 그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친구야. 우리 화해하자.”라고 말하며 팔을 크게 흔들며 악수를 한 후, 박력 터지게 끌어안고 등을 팡팡 두드린다. 그러고 나면 웃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나의 화해 방법이 단순하다면, 남편의 화해 방법은 약간 고단수다. 

그는 툭툭 던지는 재미있고 어이없는 말들로 웃음을 이끌어 낸다.


얼마 전, 역시나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 것으로 말다툼을 한 후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가 책을 보다가 질문을 했다.

“노예가 뭐야?”

“음.......”


8살 아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웃음기 어린 슬픈 표정으로 시무룩한 목소리를 내며 남편이 말한다. 

“아~ 아빠 같은 사람이 노예야. 엄마가 아빠 일 시키고 막 구박하지? 옛날에 노예들이 그랬어.”

애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오늘은 삐쳐있는 내 눈치를 보는 듯싶더니, 갑자기 “아!!!” 하며 소리를 지르고 주저앉는다. 왜 그러나 싶어 보니 손가락을 쥐고는 아프다는 시늉을 한다.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렸더니 다급하게 말한다.

“미땡이! 119! 119!”


그 말을 듣고 아이들이 출동한다. 4살 아이는 입으로 호호~ 불어주고, 8살 아이는 아빠의 손을 살펴보더니 담담하게 말한다. “아빠. 피 안 나. 괜찮아.”


내가 반응을 안 보이니 데굴데굴 구른다. 노력이 가상해 이쯤에서 어쩔 수 없이 아는 채 해줘야 한다.

나는 다급한 척 다가가 말한다.

“어디 어디! 무슨 일이야! 심폐소생술 하자! 똑바로 누워!”

그리고는 억지로 눕혀 장난스레 심장 부위를 두 손을 눌러댄다. 아이들도 같이 누른다. 4살 아이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대며 아빠의 배에 올라타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렇게 웃다 보면 몇 분 전 다투었던 일은 기억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연애 6년 동안 다툰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결혼 준비할 때도 다툰 적 없는 우리였는데.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 각자의 삶에 변화가 일고 약간의 고단함이 몰리다 보니,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희미해져 다툼이 생겨버린다. 다툼의 원인을 가만 생각해보면 서로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이 양육방식에 관한 일이다. 

내가 조금만 더 이해하면 될 텐데, 아직 그게 잘 안되는 걸 보면 철이 들지 않았나 보다.


가끔 다투기는 해도 서로 화해의 기술을 갖고 있으니 금방 풀려 다행이다. 나의 화해법과 그의 화해법이 서로에게 통한다는 것 자체가 고마울 따름이다. 화해의 방법이 다소 유치할 수도 있지만, 화해의 순간만큼은 17살의 소년과 소녀로 돌아가기에 가능한 것 같다.


나에게만 통하는 재치를 소유한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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