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잘 대접하기

차라리 아프고 싶다는 말

by 몽돌

2년 전 긴 휴직에서 돌아와 복귀 후 며칠이 지났을 무렵, 정기 건강검진을 받았다. 건강나이가 무려 20대 초반 새내기 나이로 나왔다.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걷고 돌아와 매일 요가하고 건강한 밥을 먹은 덕분이었다.


그리고 2년이 흘러 최근에 다시 정기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고작 2년 새에 건강나이가 현실의 나이와 비슷해졌다. 근육은 줄어들고 시력은 나빠지고 허리둘레는 늘어나는 등 모든 지표가 다 나빠졌다. 건강검진표를 받아 들고 나서 그동안 내가 내 몸을 얼마나 부려먹었는지 알게 되었다. 지난 2년간 번 돈은 건강나이 n살의 무게였구나… 말 그대로 몸을 태워서 돈을 벌었구나.







이번 주 주제는 몸이다. <내 몸 잘 대접하기>.


사람들은 흔희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밀어붙이고, 절박해지기 전까지는 몸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몸이 경고신호를 보내도 무시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고된 하루를 보낸 끝에 침대에 몸을 던집니다. 농장에서 자란 저의 아버지가 가끔 하시던 말씀 그대로 ‘말을 실컷 부려먹고 그냥 내동댕이치는’ 형국입니다.


회사를 다니면 자기 몸과 마음의 고통에 둔감해진다. 모멸감에 반응하지 않게 된다. 위통에 놀라지 않게 된다. (만성위염은 직장인의 마스코트 아닌가요) 점심시간에 뜨거운 국물을 허겁지겁 입에 퍼넣으며 식사를 하고 (소화가 안 되는지도 모르고), 한참 지나 퇴근길에야 입천장이 까져있음을 알게 된다. 남들의 피드백에는 예민해지고 내 몸의 감각에는 둔감해지는 것이 밥벌이의 과정인 걸까?


그렇다고 열심히 일할 때만 몸을 부려먹는 것도 아니다.


한잔 더, 한잔 더, 를 외치는 술자리에서, 몸속에선 이제 그만하라고 외치는데도 그냥 분위기에 취해서, 또는 재미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 계속 잔을 부딪혔던 적이 얼마나 많은지. 약속이 몰린 주말, 친구에게 NO를 하는 것이 미안하고 또 귀찮아 연이어 약속을 잡기도 했다. 몸은 전혀 즐겁지 않은데도 입으론 웃고만 있었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몸을 무시하면서 살면 내 마음도 알 수 없게 된다. 계산 잘하는 머리로만 살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새에 고꾸라지고 만다. '몸을 실컷 부려먹고 내동댕이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나자빠지는 그 순간까지 참고 또 참는다. 몸이 참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샤워를 하다가 어느 날 가슴에 멍울이 만져졌다. 크기와 모양이 심상찮아서 병원에 전화해 검사 예약을 잡았다. 유방암이면 어떡하지. 나는 아직 나이도 어린데, 아직 유방을 쓸(?) 일도 많은데. 검색을 하면서 증폭되는 걱정 속에서,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햇살 같은 기분이 있었다. '그런데 만약에 아프면...... 안 해도 되겠다.'


아프다면 하지 않아도 될 많은 일들이 떠올랐고(회사를 다니는 것을 포함해)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그것들을 하지 않아도 되는 미래를 상상했다. 그러면서 스쳐간 찰나의 기쁨이 나를 아프게 했다. 차라리 아프면 좋겠다니, 내가 굉장히 잘못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아니 얼마나 대단한 걸 붙들고 있길래, 아프지 않고서는 내려놓질 못해? 동시에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세상에 정말로 아파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프면 좋겠다니 그게 얼마나 나쁜 생각이냐고.


다행히 초음파 검사 후 큰 문제가 없는 결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아플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순간 잠깐 스쳐 지나간 그 느낌(아프면...... 안 해도 되어서 좋겠다)을 잊을 수 없었다. 최근에 아이를 낳은 친구에게 망설이며 그 이야기를 하자 친구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나도 가금 그런 생각하는데! 애기는 너무 이쁘지만 가끔은 그냥 어디가 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싶을 때도 있어. 병원 천장이나 보면서 누워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하고. "


물론 그녀도 그런 생각 이후에는 항상 한 움큼의 죄책감이 따라온다고 덧붙였다. 무슨 엄마가, 무슨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아프길 바랄 수 있냐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작은 집에 말이 통하지 않는 신생아와 종일 갇혀서 어떤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지 알기에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차라리 아프면 좋겠다는 말에 공감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정말로 아픈 사람 앞에서 누가 될까 봐 말을 삼키지만, 울고 싶은 몸과 마음을 이끌고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속에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차라리 다리 하나 부러졌으면, 차라리 크게 기침이라도 났으면. 하지만 돌봐야 할 가족과 메꿔야 할 잔고와 그동안 배워온 도덕 앞에서 사람들은 '아니 이게 무슨 몹쓸 생각이야.'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차라리 아프고 싶다'는 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아픈 사람들이다. 아프고 싶다는 건 사실은 쉬고 싶다는 말, 남들 눈에 보이는 핑계를 대어서라도 다 내려놓고 싶다는 말이다. 참고 참던 몸에서 이제 제발 멈추라고 보내는 신호이기도 하다.







좋은 친구를 잘 대접했을 때를 기억해 보세요. 그때 친구를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친구에게 어떤 일을 해주었나요? 친구에게 잘해주니까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오늘 하루 내 몸을 또 하나의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잘 대접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얀 얼굴에 영화 <아멜리아> 주인공처럼 짧게 자른 단발이 인상적이었던 대학교 동아리 언니는, 모임에 초대를 받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좀 쉬다가 괜찮아지면 갈게!"


그건 가기 싫다는 거절이 아니라 정말로 컨디션이 좋아지길 기다려서 가겠다는 의미였다. 언니는 침대에 누워서 기운이 차려지길 기다렸다가, 이제 충전이 되었다 싶으면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립스틱을 슥슥 바르고 모임에 왔다. 그리고 누구보다 깔깔거리면서 놀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이렇게 말하고 쿨하게 떠났다.

"나 피곤해서 먼저 갈게! 재밌게 놀아!"


'너 언제 가? 너 갈 때 나도 같이 가자.' 같은 모의는 전혀 필요 없다는 듯이, 그녀는 늘 혼자 당당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좀 쉬다가 갈게!"

"난 피곤해서 먼저 갈게!"

나는 그 말들이 세상에서 가장 기품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언니는 독감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아프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는 자기 몸을 마치 온도계를 바라보듯이 섬세하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남들의 기대를 가볍게 뿌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가볍고 산뜻하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말하면, 아무도 그에 대해서 칫, 뭐야...라고 할 수 없었다.


항상 발랄하게 술자리를 떠나던 언니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몸이 힘들면 바로 남의 기대에 선을 그을 수 있는 용기에 대해서 생각한다.

몸을 말과 소처럼 종일 부려먹다 잠자리에 내동댕이치는 게 아니라, 좋은 친구를 대하듯이 배려하는 자세 말이다.




내 몸을 나의 가장 좋은 친구처럼 대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커피를 들이부어가며 일하는 게 아니라, 피곤하면 쉬어가면서 하는 것이다.


찢어지게 피곤한 안구에 인공눈물을 수시로 넣어주기를 잊지 않는 것이다.


따뜻한 물에 조급하지 않은 샤워를 하고 나서 깨끗하고 보송보송한 타월로 몸을 천천히 닦는 것이다.


피곤한 주말에는 약속을 거절하거나 품을 들여 약속시간을 변경하는 것이다.


짜증과 우울이 올라올 때, 가족과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잠자는 시간을 꼭 챙기는 것, 못 잔 날은 그다음 날에라도 좀 더 자려고 하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내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휴식, 영양, 수면, 일탈...)을 주는 것이다.

엄마나 할머니가 지금 나를 보면 할 말을 내가 대신 해 주는 것이다. ("아니 이 시간까지 저녁도 안 먹고 뭐하노! 다 먹고살려고 하는 짓인데!)


피곤한 몸의 멱살을 잡고 원하는 곳으로 질질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어르고 달래어 쉬엄쉬엄 함께 걷는 것이다.




그렇게 내 몸의 좋은 친구가 되어 살다 보면, 언젠가는 '차라리 아프면 좋겠다'는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프다는 핑계 없이도 싫은 것들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 나라는 한정된 자원을 귀하게 아껴 쓰는 사람으로 변해갈 수 있을까. 그래서 '아프면 좋겠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라고 이해 못할 외국어를 보듯이 질문하게 되는 날이 올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스스로를 용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