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돌 Sep 07. 2022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나의 인생은 이제 여기에 있다

생일을 앞두고 남편이 무엇을 갖고 싶으냐 물었다. 여자는 선물은 됐다고, 자유시간을 갖게 애를 좀 봐달라 했다. 저녁 수유를 하고 거울 앞에 선 여자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한다. 언제 감았는지 기억나지 않는, 대충 묶은 머리는 아기에게 쥐어뜯겨 이리저리 삐져나와 있다. 수유복 앞섶에는 젖이 흘러 하얗게 굳은 자국과 아이가 잠든 사이 급히 밥을 먹다 흘린 김치 국물이 묻어 있다.


얼굴에 로션 이상의 무언가를 바르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다. 이젠 꼭 남의 옷 같이 낯선 검은색 출근용 원피스에 스타킹을 신고 코트를 걸친다. 백화점을 가야지, 여자는 생각한다. 마치 일주일 내내 야근하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 백화점을 방문한 싱글 여성인 것처럼. 예쁘고 반짝거리고 향기 나는 것들을 잔뜩 보고 싶다. 실컷 쇼핑을 하면 육아에 지친 마음에 볕이 좀 들지 않을까. 아이를 낳고 지난 몇 달간 육아용품 외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오늘은 나를 위해 카드 백만 원쯤은 긁어보겠다는 각오로 여자는 집을 나선다. 현관에서 습관처럼 검은색 운동화를 신다가, 커다란 큐빅이 달린 벨벳 구두로 바꿔 신는다.


여자는 지하철에 오른다. 지하철을 타는 것 또한 오랜만이라 카드를 개찰구에 찍으며 여자는 마음이 두근거린다. 아기를 데리고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을 탈 엄두를 내보지 못했다. 이른 퇴근길 지하철에는 검은색 패딩을 입은 직장인 무리로 가득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쳐 있었지만 휴대폰을 열심히 붙들고 있는 뒷모습에서 퇴근 후의 생활에 대한 기대감 또한 느껴졌다. 몇 달 전만 해도 여자는 저들과 같이 매일 출근을 하고 퇴근을 했다. 어른 사람들과 고등한 언어를 쓰며 고차원의 대화를 하고,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모니터 속 보고서를 읽던 날들을 떠올린다. 오늘 하루 종일 여자는 맘마, 쭈쭈, 기저귀, 응가, 같은 단어만을 이야기했다. 아무리 뜨거운 커피를 타도 이것저것 아이의 수발을 들다 보면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백화점에 도착한 여자는 1층 화장품 매장에서 풍기는 짙은 향수 냄새에 온 몸의 감각이 오소소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아이가 없던 시절 여자는 이것저것 특이한 향수를 사서 뿌려보는 것을 좋아했다. 임신 중에는 입덧으로 향수를 멀리하게 되었고, 아기가 태어난 후에는 강한 향이 아기에게 좋지 않다 하여 무향의 비누로만 손을 씻는 사람이 되었다. 향수를 산다 해도 당분간 뿌릴 수도 없겠지.


여자는 2층 잡화 코너로 향한다. 아름다운 곡선의 구두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 족저근막염이 온 여자는 아직 구두 위에 올라탈 자신이 없다. 3층 여성복 매장으로 향한다. 출산 후 아직 살이 빠지지 않아 무엇도 사고 싶지가 않다. 복직을 하려면 계절이 몇 번은 바뀌어야 할 터. 지금 옷을 사도 입고 나갈 곳도 없이 옷장에서 썩기만 할 것이다. 5층 서점에 가 책이라도 사 볼까. 새벽마다 몇 시간이고 잠투정을 하는 아이 때문에 늘 수면부족 상태라, 책을 사더라도 언제 읽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여자의 발걸음은 자동으로 6층 키즈 매장의 아기 옷 코너로 향한다. 아기에게 입혀 보고 싶은 옷 몇 벌을 꺼내 계산대로 가려다, 온라인 가격을 검색해 본다. 매장 세일 상품도 온라인 최저가보다 비싸 여자는 소비를 단념한다. 집어 든 옷을 다시 매대에 걸어두며, 여자는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합리성이 지독하게 진절머리 난다고 생각한다.


벌써 일곱 시 반, 백화점 영업 마감시간인 8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여자는 남편이 아이를 잘 보고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한다. 남편의 “육퇴” 후 야식이라도 사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는 지하 푸드코트로 내려가 마감세일을 하는 안주거리를 쓸어담고, 양손 무겁게 음식을 들고 다시 지하철에 오른다. 결국 오늘도 여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사지 못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 애 없이 자유로웠던 날들이 생각나 감상에 잠기려는 찰나, 남편이 전화를 해서는 애가 자다 깨서 엄마를 찾는지 많이 운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에 여자는 거의 달리는 수준으로 빨리 걷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는 어찌나 불편한지, 발등에 멍이 들 것 같은데도 여자는 걷는 속도를 늦출 수 없다.

횡단보도에 잠깐 멈춰 선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아 춥다, 하고 중얼거린다. 생각해보니 이번 겨울 내내 춥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아기가 백일이 되기 전까진 아기를 데리고 집 밖으로 외출을 한 적이 없었다. 이제 좀 유모차에 태워 나가보려 하니 겨울이었다. 아기는 두꺼운 외출복도 싫어했고 유모차에 방풍커버를 씌워 나가는 것도 울며 거부했다. 자는 보일러를 튼 방에서 아기와 함께 겨울을 났다. 아기와 함께는 겨울에도 추위를 느낄 새가 없었다. 구두를 신어 시린 발바닥, 코트 사이로 들어오는 냉기를 느끼며 여자는 잠시 이전의 나로 돌아간 것 같은 쾌함을 느낀다.

집 앞 놀이터에 도착한 여자는 잠시 그곳에 서서 불 켜진 집을 바라본다. 퇴근 후 빌딩 창문을 바라보던 그때처럼.  저 곳이 이제 나의 일터다. 24시간을 근무하는 나의 일터. 나이트 근무를 앞둔 여자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집을 향해 음을 재촉한다. 관에 들어서자마자 집안의 훈기가 느껴진다. 불편한 구두를 채 다 벗기도 전에 자는 "엄마 왔다! 엄마 왔다!" 를 외친다. 남편의 품에 안긴 아기는 얼굴이 시뻘게질 때까지 울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아기는 울먹울먹거리다 통곡을 하고, 여자는 얼른 손만 씻고 아기를 받아 든다. 이상하다. 애는 앙앙 우는데 왜 혼자 백화점에 있을 때보다 마음이 편한 것인가.

여자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 재우고 아이 옆에 누워 아이의 머리 냄새를 맡는다. 아기 머리에서 햇빛 냄새가 난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숭덩숭덩 빠지고 있는데 아이의 머리카락은 봄 잔디처럼 예쁘게 자라나고 있다. 자는 아이를 두고 금살금 침실 문을 닫고 나오며 여자는 남편과 하이파이브를 한다. 각종 아이 장난감으로 어지러운 거실에서, 마감세일 안주들로 상을 차려서 넷플릭스를 틀어 놓고 늦은 저녁을 먹는다. 아이가 잠든 밤, 세상은 아름답고 평화롭고 따뜻했다.

여자는 아기 매트 위에 앉아 오랜만에 구두를 신어 까진 뒤꿈치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한다. 나의 인생은 이제 여기에 있다. 꼬꼬맘 장난감과 타이니러브 모빌과 아기체육관 사이에. 아이를 재우고 문을 닫고 나오며 조용히 속으로 지르는 환호성, 애가 깰까봐 화장실에 가서 따는 맥주캔, 몇 번을 끊어 보는 넷플릭스에서 기쁨을 느끼는 날들. 사실 그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다. 하지만 이 마음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 비밀이. 누가 물으면 그저 그해 겨울은 참 따뜻했다고, 렇게 안 추운 겨울은 처음이었다만 말하리라 여자는 다짐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