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편할 때라는 말에 대하여
육아는 정말 지옥행 열차일까
조리원에서 가장 나를 좌절시킨 말은 “조리원 천국, 나가면 지옥”이라는 말이었다. 조리원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서 혼자 애 보는 것에 비하면 천국이라 했다. 그걸 조리원 있을 때는 알 수 없고 집에 가고 나서야 느낀다 했다. 출산 후 너덜너덜해진 몸으로는 안 되는 모유수유와 씨름하고, 정신적으로는 산후우울과 싸우는 사람에게 이 말은 우울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여기가 천국이라는데 나는 천국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이상한 건가? 이 "천국"을 더 즐겨야 하는데, 더 편하게 지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돌이켜보면 임신 과정 내내, 그리고 막달까지 나를 힘들게 한 말 역시 “임신했을 때가 차라리 편하다”라는 말이었다. 아는 언니는 예정일이 한참 지나도 애가 나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던 내게 굉장히 재미있는 농담을 전해주듯 말했다.
“그런데… 뱃속에 있을 때가 편해. 낳고 나면… 도로 집어넣고 싶어 진다…”
두 아이의 엄마인 언니는 이제야 경험자로서 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어 신이 나는 듯했다.
지금도 힘든 사람에게, 그때가 차라리 편하다는 말은 대체 왜 하는 걸까?
1. 네 인생은 이제 나빠질 일만 남았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2. 지금 내 삶이 힘드니 내 말을 듣는 사람의 기분도 같이 끌어내리기 위하여
3. 나는 그때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그때가 편한 때더라. 너는 정신 차려서 지금을 즐기도록 하여라, 라는 고견을 전하기 위하여
그 어느 쪽을 생각하든 그때가 편할 때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말은 아닌 것 같다.
2주간의 조리원 생활을 마치는 마지막 날 밤, 나는 내일부터 펼쳐질 진정한 지옥이 무엇일지 두려움에 떨며 잠들었다. 그리고 남편과 상봉해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간 날, 아기가 빽빽 울어 남편과 교대로 아기를 안고 밥을 먹었고 아이를 씻기다 부부 모두 진땀을 흘렸지만, 그 무엇도 상상만큼 힘들진 않았다. 내가 익숙한 공간에 다시 무사히 돌아와 가족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상상하는 나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 상상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었다.
<그때가 편할 때다>의 행진은 계속 이어진다. 아직 누워서 모빌만 겨우 보는 아이와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육아 선배들은 말했다.
“하... 누워만 있다고? 그때가 편할 때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너도 옆에 누워 그냥.”
곧이어 경험자들의 "이앓이 하면 지옥인데 그 이빨이 열여섯 개는 나야 끝난다”, "처음 아랫니 날 때 하는 이앓이는 양반이다, 마지막 어금니 날 때가 진짜다", "분유만 먹을 때가 편하지 이유식 먹기 시작하면 밥 먹이다 하루가 다 간다”, “기기 시작하면 지옥” “걷기 시작하면 본격 지옥” 이라며 온갖 지옥불 저주의 행진이 이어졌다. 이제 내 육아는 다른 사람들 말대로 정말로 갈수록 지옥인가? 를 검증하는 과정이 될 것 같다.
갈수록 지옥인데 왜 언니는 둘까지 낳았어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이 즐거워 보여 그 즐거움을 누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뭐야... 사실은 할만한 거 아니야?라고 속으로 의심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그녀는 사실은 육아가 행복한데도 한국인 특유의 겸양을 발휘해 좋은 부분은 쏙 감춘 채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통과해 버린 삶의 단계에 대해 거리를 갖고 말할 수 있는 자의 여유가 부러워 돈으로 살 수 있다면 빚을 내서라도 사고 싶었다. 하지만 저건 일시불로 카드를 긁어 살 수는 없는 경지일 것이다. 육아의 모든 단계를 매달 묵묵히 할부로 갚아나간 자에게만 주어지는 여유. 나도 언젠가 이 시기를 마침내 통과하여 저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들의 말에 따르면 신생아을 키우는 나는 살금살금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음에도, 전보다 몇 가지 좋아진 점도 있다. 아기를 낳고 나니 일단 몸이 가벼워져 좋다. 가장 좋은 것은 엎드려 잘 수 있게 된 것이다. 아기 때문에 자주 깨어야 하지만 적어도 자유롭게 몸을 앞뒤로 뒤척이며 잘 수 있다.
두 번째는 길거리의 담배 연기를 피해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임산부일 때는 길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만 보면 흡, 하고 호흡을 참거나 바람의 방향까지 고려해 멀리 돌아가곤 했다. 나는 내 몸을 망칠 자유가 있지만 뱃속의 아이는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 담배연기 속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꼈다. 이제 아이와 한 몸을 쓰지 않게 되자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담배연기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가끔은 그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담배연기 사이를 유유히 걸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길에서 만삭의 임산부를 만나면 나는 불과 얼마 전의 내 모습임에도 경이로운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본다. 저렇게 무거운 걸 매일 들고 다녀야 한다니. 저렇게 소중한 생명의 안위를 오직 나만이 챙길 수 있다니. 속시원히 꺼내어 의사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남에게 잠시 맡길 수도 없다니. 정말 말 그대로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고 있구나.
나는 그에게 “지금이 사실 편할 때”라는 말을 감히 건넬 수 있을까.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힘들지, 곧 지나갈 거야, 라는 말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더 강력한 괴로움이 나타난다고?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엄마됨에 있어 가장 힘든 것은 언제나 지금이다. 언제나 처음이 가장 힘들다. 처음 겪는 혼란과 불안 속에서 변화에 적응하느라 열심인 사람에게 너는 지옥행 열차에 탔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미리 두려워하지 말자. 인생이 제아무리 점점 더 난이도가 올라가는 게임 같아도, 나 역시도 그 게임 속에서 부지런히 성장해 가고 있음을 잊지 않기를. 가장 힘든 처음을 통과하고 있는 자신을 어여삐 여기며, 최대한 덜 힘들게 이 터널을 지나갈 수 있기를. 이 말은 오늘도 아기와 함께 분투한 나에게 고스란히 그대로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