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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Aug 30. 2022

오후의 햇살이 나는 무서웠다

외딴섬 유배 생활의 기록

아이를 낳고 주양육자가 된 이후, 남들이 무엇이 가장 힘드냐 물을 때 나는 그때그때 다른 대답을 했다. 젖을 먹이는 것이 힘들다, 잠을 못 자는 것이 힘들다, 하루 종일 먹이고 기저귀 갈고 재우는 일과를 반복하는 것이 힘들다, 외출을 하지 못하는 것이 힘들다, 편하게 밥을 먹을 수 는 것이 힘들다… 모두 사실이었지만 정말 나를 괴롭게 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사실 가장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오후의 햇살이었다.





엄마의 하루는 느리게 흐른다. 여섯 시 반, 아이가 깨면 일어나 기저귀를 갈고 아이를 안고 집안 산책을 한 바퀴 한 뒤 첫 수유를 한다. 한 시간 동안 타이니러브 모빌을 틀고 초점책을 보여주며 함께 놀아준다. 여덟 시, 아이가 졸려하기 시작한다. 자장가를 삼십 분간 불러 여덟 시 반에 첫 낮잠을 재운다. 아이는 짧게는 삼십 분, 길게는 한 시간을 잔다. 일어나면 다시 수유를 한다. 이 세네 시간의 과정이 한 세트라면 총 네 번을 더 반복해야 하루가 가고 아이가 밤잠에 든다.


두 세트를 반복하고 나면 오후가 된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멍하니 거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후의 금빛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거실 전체를 물들였다. 그 평화롭고 느긋한 햇살을 보면 마음이 따끔거렸다. 나는 혼자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인가. 내 인생은 이제 여기에 붙들려 버린 것인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지, 권태로워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앞으로 남은 휴직 기간 내내 이 햇살을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햇살에는 절대로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후의 햇살은 역설적으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살던 날들을 떠올리게 했다. 사무실에 출근해 하루 종일 바깥에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모르고 일하다가, 퇴근 즈음이 되어서야 아 비가 오는구나, 내가 오늘 우산을 챙겨 왔던가? 하던 시절. 그때는 평일의 햇살은 없었지만 하루를 꽉 채우는 여러 과제가 있었고, 사람이 있었고, 나와 비슷한 성인들과의 대화가 있었다. 말하자면 문명있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한 전략을 고민하고, 분노를 감춘 채 메일의 '워딩'을 다듬었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면서도 머리를 굴리지 않는 척하고, 앞에 앉은 사람의 직급에 따라 표정을 관리하던 곳. 전에는 그 문명에 지쳐서 어서 출산휴가에 들어가고 싶었다.


이제 꿈꾸던 대로 문명과 멀어진 나는 하루 종일 앞섶을 잠그지도 않고 <동물의 농장>에 나오는 다른 포유류 동물처럼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 캥거루 어미처럼 아기와 하루 종일 붙어있는다. 복잡하고 어려운 언어도 없다. 맘마, 쭈쭈, 응가, 기저귀, 코코낸내만 있을 뿐이다. 이 세계에는 어떠한 적의도 계산도 없다. 나는 아기를 사랑하고 아기는 나를 사랑한다. 그런데 이 고요하고 순수한 평화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그 불편했던 문명의 시간이 그리워졌다.


지금은 기존의 나를 채우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진 자리에 오직 나와 아이와 햇살만이 남아 있다. 회사를 다녔다면 분명 탐났을 이 오후의 햇살이 나는 무서웠다. 적막을 깨기 위해 괜히 라디오를 틀어 남의 사연에 귀 기울여 보고, 아이에게 큰 소리로 동요를 불러줘도 보고, 아기띠를 한 채 집 앞 놀이터로 나가 산책을 다녀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햇살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와 말했다. 너는 외딴섬에 있고, 이 섬엔 너와 아이 둘만 있다고, 섬 바깥의 사람들은 저들의 삶을 힘차게 지속해 나가는데, 너의 시간은 여기서 멈춰버렸다고.


나는 멈춰버린 시계를 돌려 본다. 아이의 시계를 앞으로 앞으로 당겨 미래가 되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아본다. 백 일이 지나면 낯가림을 시작한다. 6개월이 되면 이유식을 먹기 시작한다. 7개월엔 스스로 앉을 수 있고, 9개월이 되면 잡고 설 수 있다. 12개월이 되면 말귀도 일부 알아들을 수 있다. 나는 미리 아이의 미래를 상상해 본다. 그래, 그때가 되면 좀 낫겠지. 나도, 아이도. 나는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생각한다. 아직은 나는 네가 좀 더 빨리 자랐으면 좋겠어. 자장가를 몇 번을 불러야 네가 그만큼 자랄까.


네 시가 되어 햇살이 한풀 꺾이면 나는 안도했다. 다행이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넘겼구나. 꾹 참아왔던 마음은 다섯 시가 되어 피곤하고 졸린 아이가 보채기 시작하면 인내심을 잃고 만다. 마지막 수유는 분유로 해야겠다. 냉장고로 가 맥주 한 캔을 딴다.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키는 순간의 나는 임신 전의 나와 비슷해서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자제력을 발휘해 남은 맥주 반 캔을 싱크대에 흘려보내는 나는 임신 전의 나와 거리가 멀다. 취중 육아는 부끄럽지만 시간이 잘 간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친절해지고 또 관대해질 수 있다. 그렇게 알코올의 힘을 빌어 한두 시간을 더 버티다 보면 어둠이 찾아오고, 마음이 가벼워진다. 괜히 퇴근 중인 남편에게 전화해 언제 도착하는지를 묻고, 그가 현관문 비밀번호 네 자리 중 두 자리를 누를 때 이미 들뜬 나는 아이에게 오늘 중 가장 큰 목소리로 “아빠 왔다! 아빠 왔다!”를 외치고 있다.


하루 새에 또 아이가 또 자랐다고, 너무 예뻐졌다며 황홀해하는 남편에게, 그건 당신이 하루 종일 아이를 보지 않아 그런 거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오늘 나 혼자 본 아이의 예쁜 모습들을 자랑스러워한다. 급히 손만 씻고 온 남편의 품에 아이를 던져놓고 나서 나는 이제 이 아이의 예쁨을 나 혼자 감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한다. 함께 아이를 볼 수 있는 저녁을,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퇴근한 밤을 나는 사랑하게 되었다. 밤에는 마음이 따끔거리지 않고, 외딴섬에 홀로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까.






햇살이 더 이상 무서워지지 않은 건 엄마가 되고 반년은 지난 뒤였다. 비슷한 듯 다른 낮과 밤이 여러 날 지나고, 마음이 물러졌다 단단해졌다를 여러 번 반복한 였다. 어느 날 아이를 품에 안고 낮잠을 재우다 아이의 얼굴로 오후의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보았다. 햇살이 속눈썹 밑에 그늘이 드리우고 아이의 통통한 뺨과 입술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아이가 깨지만 않는다면 더 세게 으스러져라 안아주고 싶었다. 괜히 얼굴에 후 하고 바람을 불어 아이를 간지럽혀 깨우고 싶기까지 했다.


그 순간 알았다. 이제야 나는 아기가 조금 더 천천히 자라기를 바라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전처럼 오후의 햇살이 두렵지가 않다는 것을. 햇살이 거실을 가득 채울 때의 그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은 여전히 낯설지만 전처럼 도망가고 싶지는 않았다.


햇살은 말했다.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많다고. 이 외딴섬에서 우리 둘의 시간은 느리고 평화롭게 천천히 흐를 것이라고. 이 섬에 유배된 것 같은 생활이, 그동안 내가 속했던 세계와의 단절이기도 하지만 아이의 모든 처음을 함께할 수 있는 특권이자, 오래가지 않을 짧은 허니문이라는 것을. 마음을 섬 바깥이 아니라 섬 안에 두자 햇살은 더 이상 따갑지 않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가장 두려워했던 일을 내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 마음의 키는 한 뼘 더 자란다. 절대로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에 어느새 적응한 나를 발견하는 순간, 다른 두려움과도 맞서 볼 용기가 생긴다. 이 외딴섬 안에서, 고요한 햇살 아래서 나와 아기는 함께 자랐다. 모두가 아기의 개월 수와 몸무게만을 물을 때, 나만은 조용히 속으로 내 마음의 성장을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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