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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Jul 31. 2022

조리 없는 조리원 생활

임신을 확인하고 제일 먼저 먹고 싶었던 것은 딱딱하고 아삭한 복숭아였다. 예정일인 8월은 마침 복숭아의 계절이기도 했다. 혹시 이번에도 아기가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발갛고 통통한 복숭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무사히 임신을 유지할 것이고, 8월이 되면 복숭아를 실컷 먹고 복숭아 같은 아기를 만날 것이다. 이것이 불안을 해소하는 나의 주문이었다.


8월을 넘겨 9월에 만난 아기는 잘 익은 복숭아 같이 건강했다. 아파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면서도 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런 예쁜 아기를 낳다니 그 열 달의 고행과 출산의 고통도 충분히 할 만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갑자기 흘러넘치는 모성애에 스스로 놀랄 지경이었다. 병원에서 이틀 밤을 보낸 뒤 우리는 아기를 바구니 카시트에 소중히 모시고 조리원으로 향했다.






조리원에 가면 내 몸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힙하고 쿨한 엄마가 되어야지 생각했다. 모유수유에 매달리지 않고, 아기는 신생아실에 백 프로 맡긴 채 푹 자고 잘 먹고 지겨울 때까지 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역시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코로나 시국이라 조리원에서는 산모의 외출도 가족의 방문도 엄격히 제한했다. 혼자서 산후우울증이라도 앓을까 무서웠던 나는 무조건 볕이 잘 드는 방을 달라고 요청했다. 방은 햇살이 기가 막히게 잘 들어 벽지가 노랗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방에서 금빛 햇살을 쬐며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면 그 햇살에 몸이 베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를 이상한 감정이었다. 적막을 깨기 위해 넷플릭스를 틀고 음악을 들어도 그 따끔하고 허전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열 달간 반짝이는 별을 품고 다녔다. 그 덕에 나도 빛이 났다. 출산을 한 나는 빛을 잃고 아기의 위성이 된 것 같았다. 모두의 배려를 받으며 온갖 호사를 누리던 임산부에서 하루아침에 한 생명을 책임지고 길러내야 하는 엄마가 되었다. 그건 하늘 끝에 있다가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은 낙차였다. 


이때까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였던 아기는 두려운 미지의 존재가 되었다. 왜 우는지, 왜 몸을 비틀며 얼굴이 빨개지는지 알 수 없었다. 수유 자세도, 트림시키는 법도, 기저귀 가는 법도 아무것도 몰라 다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나는 혼자 방에서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무엇에라도 매달리고 싶어졌다.


아이는 신생아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가 젖을 먹어야 할 때 방으로 왔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 곧 아기가 온다는 뜻이었다.


“산모님, 우리 아기가 먹고 싶다는데요, 지금 갈까요?”


일명 "수유콜"이라 불리는 그 전화를 나는 거의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았다. 아기는 한두 시간에 한 번은 모유나 분유를  먹어야 했는데 갓 태어난 아기와 갓 엄마가 된 나는 서로 제대로 도킹하지 못해서 한참 끙끙거리기 일쑤였다. 아기는 또 한두 시간 뒤에 울면서 젖을 찾았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모유양이 많은 편이었다. 차라리 젖이 안 나왔으면 모르겠는데 나오는 모유를 버릴 수도 없어서 나는 본의 아니게 모유수유 우등생이 되어갔다. 새벽마다 젖몸살이 와서 가슴이 불타는 것 같은 통증에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저절로 깼다. 깬 김에 유축이나 하자며 유축기 깔때기를 삼십 분씩 잡고 있으면 잠이 다 달아났다.  유축한 모유를 신생아실에 갖다 주러 가며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면 꼭 고문받은 독립투사처럼 퉁퉁 부은 얼굴을 한 퀭한 여자가 서 있었다.


젖, 젖, 젖. 그것은 정말 소리 없는 젖전쟁이었다. 쿨한 엄마가 되겠다는 원래의 계획과 달리 나는 모유양을 착실히 늘리며 조리원 원장님의 칭찬을 받는 모유수유 우등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기는 갈수록 살이 붙고 예뻐졌다. 아기를 직접 만날 수 없으니 모두 나를 통해 아기의 안부를 물었다. 양가 어르신들은 조리원 신생아실의 베이비 캠을 하루 종일 틀어놓고 보았다. 시댁에서는 신생아실의 베이비 캠을 계속 보다가 내게 전화를 해 아이가 계속 오른쪽으로만 누워있다며, 왼쪽으로도 돌아눕게 신생아실에 전달해달라 했다.


이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나는 거금을 내고 마사지실로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마사지실에 누워 있는 동안은 내가 한 아이의 엄마라는 것을 잠깐 잊을 수 있었다. 다친 동물이 스스로 상처를 핥으며 햇빛을 쬐듯이 따뜻한 고주파를 쐬었다. 어두컴컴한 마사지실에 누워 있으면 이제 다시 언제 갈지 모르는 여행의 기억들과 초등학교 때 단짝이었던 아이의 얼굴 같은 것이 무심히 떠올랐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보내고 다시 방으로 가면 신생아실에서 오는 수유콜도 씩씩하게 받아낼 수 있었다.


조리원의 산후 마사지는 따뜻한 돌을 몸에 문질러 땀을 내주는 수준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돈을 아낀답시고 이걸 하지 않으면 계속 마음에 그늘로 남아있을 것 같았다. 마사지실 실장은 항상 마사지를 마치고 나면 마치 백화점 직원이 VIP 손님을 모시듯 정성스럽게 가운을 입혀주고는 말했다.


산모님, 무리하지 마셔요. 절대 안정하셔요.


마사지실 실장은 항상 -셔요, 로 끝나는 말투를 썼다. 세 시간에 한 번은 유축을 하세요, 젖량을 늘리려면 잘 먹어야 해요, 같은 ‘하세요’만 듣다가 그 ‘무리하지 마셔요, 안정하셔요’만 들으면 계속 추가 결제를 하게 되었다. 산후조리의 탈을 쓴 이 모유수유 사관학교에서 엄마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는 곳은 마사지실이 유일했다. 상술이라 할지라도 누가 몸을 매만져 주고 따뜻한 수건으로 닦아주면 그 손을 붙들고 싶었다. 적막한 방 안에 덩그러니 있으며 널뛰는 산후 호르몬과 홀로 싸우느니 마이너스 통장을 뚫어서라도 마사지실에 누워 있고 싶었다.






그러 조리원 퇴소 며칠 전, 조리원에서 배정해 준 요가 선생님과 산후 요가를 일대일로 배우는 시간이었다. 요가 선생님이 어디 아픈 곳이 없냐고 물었다. 나는 아기가 나온 곳이 계속 아프다고 말했다. 세 살배기 딸아이의 엄마라는 선생님은 그럴 수 있다며,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산모님, 아기도 세상에 갓 태어나 적응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지만요, 열 달간 아기를 품었다가 막 낳은 우리 몸도 아기처럼 잘 돌봐줘야 해요.


그때 눈에 힘을 지 않았더라면 나는 요가 선생님 앞에서 분명 울어버렸을 것이다. 선생님이 돌아간 후 나는 혼자 조금 울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처음으로 수유콜을 거절할 용기를 냈다. 오늘 저녁에는 좀 쉴게요,라고 말하고 신생아실로 아기를 돌려보낼 때의 해방감을 잊을 수 없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의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시기가 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어쩔 수 없이 취약해지는 시기가 있다. 아이를 낳고 나면 두 가지가 한꺼번에 찾아온다. 그래서 힘이 든다. 생각해 보그때의 나는 정말 많은 보호와 배려, 그리고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내가 나 자신에게 그걸 좀 더 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삶의 큰 변화를 온몸으로 겪은 약해진 몸으로 더 약한 존재를 돌봐야 하는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 부디 자신을 조금 더 다정히 대해 달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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