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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Jan 30. 2018

다시 쉬게 된다면

퇴사, 휴직, 안식기를 앞둔 분들에게

쉬어본 사람이 전하는 잘 쉬는 노하우


라고 거창하게 이름은 붙였지만 사실 저도 쉼에 있어서는 초보입니다. 그렇지만 쉬어본 사람이 잘 쉰다고, 다음에 쉬게 되면 더 잘 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휴직을 통해 새롭게 배운 것들이 있습니다. 휴직을 하기 전에 누가 조곤조곤 이런 말을 해 주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그런 '레퍼런스'들을 찾아 헤매었지만 그런 글도 그런 사람도 찾기가 어려워 불안하고 막막했습니다. 이 글이 퇴사, 휴직, 그리고 그 외 모든 형태의 의도적인 안식기를 계획하고 계신 분들께 작은 레퍼런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https://brunch.co.kr/@freesong/9 


2015년 삼성전자가 3년 이상 근속한 사원을 대상으로 1년의 자기계발휴직 제도를 도입한 후, 여러 회사와 공공기관에서도 휴직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공무원 사회에서도 5년 이상 재직한 공무원은 자기계발을 위해 1년 동안 무급 휴직을 할 수 있다는 제도새로 생겼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자기계발을 통해 매너리즘을 깨고 창의적 발상을 할 수 있길 바란다는 취지입니다. 이제 몇 년을 열심히 일하면 최대 1년 정도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렵게 얻은 소중한 안식기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요?


먼저, 잘 선택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쉬어도 괜찮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었습니다. 늘 안정적인 궤도만을 달려온 저는 잠깐 그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 무척이나 두려웠습니다. 금수저가 아니기에 돈을 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압박을 내려놓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제가 그냥 회사를 쭉 다니면 저 빼고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살 것 같았습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이를 '임신부 식성론'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의 걱정과 반대 논리를 이해 못 할 바 없습니다. 하지만 결정의 당사자만큼 많은 갈등과 번민이 있었을라고요. 누군가 어떤 결정을 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까닭에 제가 심리적 영역에서 가장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은 '임신부 식성론'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간단한 얘기입니다. 임신 후 갑자기 먹고 싶어지는 음식은 현재 내 몸에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내 몸에 필요한 것이 자동적으로 당기는 것이지요. 그걸 먹으면 됩니다. 그게 지금 나와 태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니까요.

자기 결정에 불안해하고 그 결정을 확인받고 싶은 간절함에 외로운, 모든 이들에게 무한의 지지와 격려를 보냅니다.

당신이 늘 옳습니다.

- 정혜신 이명수 저, <홀가분> 중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린 당신에게, 잘 선택했다고, 쉬어도 된다고, 당신이 늘 옳다고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휴식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쉬고 싶어서 퇴사나 휴직을 감행하셨다면 정말 쉬시면 됩니다. 휴식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게임을 하시는 분들은 지금을 회사생활에서 고군분투하느라 바닥난 HP를 충전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합시다. 충전한 HP는 어디로 도망가지 않습니다. 쉴 때 잘 쉬어야 다시 또 일어나 걸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휴직하고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할아버지 한 명을 만났습니다. 할아버지에게 '회사를 휴직하고 순례길을 걸으러 왔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남들처럼 회사 다니고 비슷한 일상을 누리면서 살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너는 더 바라는 것이 있었던 거지(But you wanted more)' 그때부터 But you wanted more이라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순례길 이후의 시간은 '나는 무엇을 더 바란 것일까? 내가 더 원했던 그것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묻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은 사실 나는 큰 변화와 모험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진정 원했던 것은 내가 속한 곳에 깊이 뿌리내리는 것,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알고 그에 만족하는 것, 하루하루 일상에 기쁨을 느끼는 것었습니다. 그걸 위해 파랑새의 모험 같은 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구요.

우리는 자신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대개 동시대에 가장 유행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내가 속한 커뮤니티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바람직한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이 안식기를 통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이 어떤 시간이면 좋겠는지, 이 시간을 통해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몇 마디로 정리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저는 이 휴직기간을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영감과 에너지를 얻는 시간, 쉽게 물들지 않도록 자기중심을 바로 세우는 시간'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휴직을 통해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미래일기 형식으로 적어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는 가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 내 애초의 목표, 방향성을 떠올리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버킷리스트는 가볍게

쉬면서 이런 이런 걸 하겠다는 버킷리스트가 있으신가요? 이미 작성하신 리스트가 있다면 그중에서 다섯 가지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를 지워버리길 추천드립니다. 지우는 게 아깝다면 꼭 하고 싶은 일 다섯 가지와 시간이 남으면 할 일 다섯 가지 정도로 그룹화하는 것도 좋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시간이 무한대로 많아질 것 같지만 실은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회사를 다니든 회사를 다니지 않든 일상의 몇 퍼센트는 밥 먹기, 잠 자기, 화장실 가기와 같은 권태로운 일상으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 회사를 다니면서 무시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을 스스로 처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평일 점심 식사 같은 것들이요. 가정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집안일의 무게가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크게 다가옵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 보면 뭘 한지도 모르게 하루가 가기 쉽습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했다고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추려내시길 추천합니다.


목표는 측정 가능하게

확실한 목표가 있으시다면 그 목표가 잘 시행되었는지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들면 좋습니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관리지표인 KPI(Key Performance Indicator)를 적용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회사를 나온 마당에 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숫자로 된 목표가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줍니다. 쉬면서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고 싶다면 '1주일에 한번 새로운 사람 1명과 이야기를 해 본다',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면 '매일 5개의 새로운 문장 패턴을 암기한다'와 같이 목표를 수치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목표는 있는데 구체적인 목표가 없으면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도 늘 목표에 미달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출근과 퇴근이 없는 삶이 행복할 것 같지만, 되려 일과 휴식의 경계를 모호하게 되어 늘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심플한 일상을 위해 목표의 수치화가 필요합니다.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회사원의 경우 재직기간 동안 회사에서 강제적으로 부과한 리듬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에 본인의 시간관리 능력을 과대평가하기 쉽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옆에서 실적을 재촉하는 부장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대학교 때 방학을 얼마나 알차게 보내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 정도가 보통의 우리가 무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본인의 자기관리 능력을 크게 신뢰할 수 없다면 환경을 바꾸어야 합니다. 즉 돈을 써야 합니다.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일단 운동센터에 등록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면 도서관이나 독서실, 공부하기 좋은 카페에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있자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면 해당 업계의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정말 푹 쉬고 싶은데 같이 사는 가족에게 이런저런 눈치가 보인다면 '제주도 한 달 살기'처럼 예산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아예 거주환경을 바꾸는 것도 방법입니다.


불안해하지 맙시다

돈을 벌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불안해지기 쉽습니다.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께 물려받을 것이 많은 분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차피 평생 돈을 벌어야 하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니 돈을 못 번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 열심히 직장 생활하고 돈을 벌면서 잃었던 것들이 분명 있었을 겁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 가족과 보내는 시간,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여유 등등이요. 지금은 그때 잃었던 것들을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 손에 있는 것을 충분히 즐깁시다.



휴직 기간을 나름 잘 보냈다고 생각하는데도 복직을 앞두고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돌아가 같은 지점에서 또다시 넘어질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제가 한 선택이 백 프로 좋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을 통해 배운 것들은 온전히 나의 것입니다. 그 배움을 잠시 멈춤을 선택한 당신에게 나누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본적 안식기를 앞둔 당신에게, 추천도서


1. 잘 했다고 지지받고 싶을 때: 이명수 정혜신, <내 마음이 지옥일 때>

http://ch.yes24.com/Article/View/33187


사회가 정해준 규정들이 있어요. 장남이란, 20대에는, 30대에는, 부모는, 이런 규정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은 모두 편견이고, 사람에게 심리적 폭력이며 족쇄예요. 우리가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지옥에 들어간다고 생각해요. 모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예요.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책이나 부모님, 선생님이 들어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마음은 오로지 '나'예요. 내가 내 마음을 지지해줘야 해요. 너무 힘든 상황에 놓여있어도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세요. 내 감정, 내 마음은 내 것이니까요.

- 정혜신, 채널예스 인터뷰 중에서


2. 심플한 일상, 목표의 간소화 관련: 탁진현, <가장 단순한 것의 힘>

국내에 나온 미니멀리즘 관련 서적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많았던 책입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805903


3. 쉬면서 뭔갈 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피곤하다면: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같은 저자의 <행복의 정복>도 같이 읽으면 좋습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45509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4. 혼자 외로운 날에: 안도현, <백석 평전>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696980


시가 산문이 줄 수 없는 위로를 줄 때가 있습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깊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남신의주유동박시봉박) 같은 구절들을 읽다 보면 마음속에 쌀랑쌀랑 따뜻한 눈이 쌓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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