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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쌤 May 18. 2020

17) 슬퍼? 그래, 울어도 돼!

   

캐나다 유치원 적응에 힘든 점이 여러 가지 있었다. 

처음으로 해보는 일주일에 40시간 toddler반 근무는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이었고, 

아이들, 동료, 학부형들과 대화가 많이 요구되는 근무환경, 그리고 교사의 창의력과 깊은 사고가 필수인 우리 원의 교육철학은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나에겐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던 부분;   

아이들의 독립성을 키우기 위해 내가 다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가 아프다는 이유로 과잉보호하던 엄마였고, 아이가 우는 것을 보기 힘들어했다. 


만 24개월, 일 년 후엔 만 18개월부터 시작하는 반으로 바뀌어서 당연히 많이 울고, 선생님의 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나이였다. 

아이가 울면 일단 달래주고,  신발을 못 신으면 신겨주고, 장난감을 못 가져 속상해하면 나눠 놀자고 내가 제안하거나 다른 장난감을 주어 달랬다.     


그런데, 내 동료들은 일단 울어도 된다고 말해준다. 

"슬퍼? 그래, 울어도 돼!"


아침에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서 우는 아이의 경우, 무조건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보다는

교사가 도움을 주는 수준에서 아이가 그치지 않으면, 조용한 구석 공간을 내어준다던지, 

아이 혼자 또는 교사와 함께 시간을 가지고 감정이 가라앉게 도와준다.

이것은 1:6 교사대 아이의 비율과 동료가 항상 한, 두 명 교실에 같이 team으로 있기에 가능한 환경이다.   

  

내가 놀고 있던 장난감을 아이가 달라고 한다. 

양보나 나눠 쓰기의 의미를 가르친다고 생각으로 나는 내 것을 준다. 

내 동료는 "It's mine." (이건 내 거야.) 하며,

아이가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위해서 기다리거나, 나눠달라고 말하거나 

다른 장난감을 고른다던지 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게 한다. 

작아 보이지만 내겐 큰 가르 침중에 하나였다.     


아이가 고민할 시간 충분히 주기,

그 시간들 속에서 성취감 느끼게 하기.

내가 도와주면 사실 빨리 끝나지만, 

아이가 스스로 터득할 기회를 뺏는 것임을 배웠다


아이가 길을 걷다 넘어지면, 나는 바로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동료는 아이가 스스로 일어날 시간을 주고, 도움이 필요한 지 물어봤다. 

이 차이를 알고 나니, 아이가 넘어질 때 바로 도와주려는 내 몸을 멈추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했다.

   

누구에게도 Yesman이던 나는, 캐나다에서는 무조건 Yes라고 할 게 아니고, 

필요에 따라 No 하는 분별력을 기르며, 아이들이 생각하고 행동할 기회를 뺏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무조건 울음 빨리 그치게 하기, 신발 신기나 옷 입기 도와주기, 하트 그려달라 할 때 그려주기, 지금 당장 나만 봐달라는 아이에게 튀어가기 등등, 나여서 힘든 상황들이었다.

 

필리핀 엄마의 아이가 새로 등록했다.

한국인인 나의 외모가 엄마랑 비슷해 보였는지, 아이는 나를 mommy라고 부르며 강한 애착을 보여서, 내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울고, 나만 따라다녔다. 

내가 다른 아이 기저귀 가는 시간조차도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관찰하던 동료는

"Sue 가 일하고 있으니 그렇게 같이 있고 싶으면, 기저귀 가는 곳 옆에 의자를 둘 테니 거기에 앉아 있어!"

라고 했다.

아이는 막무가내로 울었고, 동료는 아이를 복도로 데려가 다시 설명해주었다.

복도와 교실 안 의자 사이를 여러 번 오가며 설명하는 동료 옆에서 한참을 울던 아이는 내 옆에 있는 것을 선택하고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나를 기다리게 되었다.


일하느라 바쁘면서도, 이 상황이 정리되는 걸 지켜보던 난, 그 동료의 침착함이 놀라웠다.

아이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것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지만, 아이가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 일관되지 않게 반응하고, 아이의 울음에 흔들린 게 그동안 내 실패의 원인이었다.


아기로만 보던 나의 시선과 달리, 어려도 자기 일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믿던 동료는 만 두 살이 안된 아이들도 화장실에서 혼자 바지 내리기부터 팬티형 기저귀 갈기 등을 알려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그 '기술'을 습득한 걸 뿌듯해하며, 결과적으로 기저귀를 빨리 떼는데 도움이 되었다.


교사의 믿음이 얼마나 큰 결과의 차이를 가져오는지, 내가 교사니 내가 다 해주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아이들이 배울 기회를 뺏고 있었구나 하는 교훈을 얻었다. 


이제는 내 몸이 더 이상 튀어나가지 않는다.

아이가 할 수 있게 시간과 기회를 충분히 준다. 

나에게 실패라고 보이는 상황에서도 함부로 끼어들어 성공이 되게 하지 않는다.

하트를 그려달라 하면 그려주기보다는 "하트는 어떻게 생겼어? 아님 네가 먼저 보여줄래?" 하고 대화로 유도한다.


아이들만 키운 게 아니라 나도 키운 것 같다. 

좀 더 바람직한 교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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