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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쌤 May 22. 2020

19) 기러기 아빠 날아오다

 

딸들이 남편 입국하던 날 공항에 들고 간 홍보판, 사진출처:수쌤


한국에서 학원을 운영한 경력이 인정되어서 유치원에 취업 후 바로 Skilled Worker 이민 신청을 했다.

남편이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서류 준비는 수월했고, 캐나다로 들어올지 결정이 안 된 상태였지만, 남편까지 모두 4명이 서류에 올라갔다. 



원래 남편은 내가 캐나다에 가는 것을 반대했고, 최장 2년 안에 돌아오라는 조건을 걸었었다. 

안정된 회사에서 20년째 근무 중이었고, 그대로 있다가 정년퇴임까지 하는 게 희망사항이었다.



가족 셋이 다 떠나버리고, 안 돼서 돌아올 줄 알았는데, 

편입 후 결국 영주권 신청이 들어갔고, 그렇게 힘들게 정착한 부인이 한국으로 돌아오기 싫어할 테니 그도 생각이 복잡했을 것 같다.



첫 일 년이야 시골에서 올라오신 시어머니께서 식사도 챙겨주시고, 저녁에 불 꺼진 집에 들어갈 염려 없이 퇴근했다. 

그러나 당신 인생 즐기셔야 할 연세에, 

번호키로 열어야 하는 아파트 문조차도 낯선 어머니를 가둬둔 죄송한 마음이 커서 내려가시게 하고 혼자 일 년을 보냈다. 



혼자 만들었다고 보낸 사진 속의 음식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냥 먹을 수는 있는 음식들. 

칼퇴근 후 하던 대로 영어 공부하고 운동하고도, 뭔가 몰두할 게 필요했던지 배드민턴을 배웠다. 

이렇게 하고도 혼자 있는 시간은 너무 길고, 휴일에 가족여행 가는 동료들을 부러워던 남편의 한숨이 길어졌다. 



기러기 아빠들의 고독사 기사가 예사롭지 않던 때, 

한 번은 아픈 남편과 하룻밤 동안 연락이 계속 되지 않아서 멀리사는 올케에게 가서 아파트 문을 두드려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올케의 보이스톡으로 아파트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한참 후 그렇게 부스스 깬 남편과 인사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마음을 놓은 적이 있다. 

아픈데 얼떨결에 받은 죽을 혼자 먹고 있을 것을 상상하니 내 맘도 편하진 않았다.



아주 오랜 고민과 갈등 끝에 희망퇴직을 결정했고, 당연히 동료들은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희망퇴직을 하려고 하던 때가 아니어서, 마침 회사에선 좋은 조건을 내걸었다. 



내가 이때 자주 한 말은 

버틸 수 있으면 거기에 있고, 올 거면 한 살이라도 빨리 와서 공부든 취업이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white color였던 사람들은 영어가 유창하다면 모를까 캐나다에서의 취업이 정말 힘들다. 

결국 여기서 학교를 나와야 좀 유리해지는데, 나이가 적지 않으니, 와서 일단 취업준비나 입학을 해보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남편은 

입국 후 어학원에 등록하여 전문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를 하다가 스쿨버스 기사로의 취업을 잠깐 고려했는데 내가 반대했다. 

대학 졸업장과 함께 캐나다에서 공부해보는 기회와 성취감, 거기서 생기는 모든 인맥, 취업, 문화의 이해 등등, 

일 년을 대학에 투자할 이유가 너무도 많았다. 

거기다 영주권이 나온 후에 입학해서 대학 등록금도 반값이었다. 

버스기사 취업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일단 어학원에서 영어 레벨을 만들고, NSCC(Nova Scotia Community College)에 들어가서 자동차 정비사(Car Technitian)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나하고의 유대관계가 깊어서 남편이 서운할 때가 많았다. 

딸들과 어떻게 소통하는 지를 잘 몰랐고, 회사 내 자리보존을 위해 자기 스펙 관리한다며 공부에 운동에 항상 바쁜 것도 원인이었다.



이 년 동안 서로의 부재를 통해서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은 잊어버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그리운 감정이 생겨서, 남편이 우리와 살기 위해 왔을 때 아이들이 진심으로 기다리고 기뻐해 주었다. 



 특히 둘째의 경우 한국에 혼자 남은 아빠에게 미안해했었고, 평소 하고싶던 격한 놀이나 운동을 아빠가 온 후로 같이 하면서 사이가 좋아졌다.                 




내가 채워주지 못한 부분들은 남편이 오면서 채워졌다. 실내암벽타기 체험,  사진출처:수쌤



나로서는

계기야 어쨌든 결혼 20년 차 정도 되면 여러 번 생각해온 별거를 하게 됐으니 솔직히 말해서 좋았다. 

대충 먹어도 되고, 대충 치워도 되고, 주말이면 친구 집에서 늦게까지 수다 떨어도 되고, 

부인이니까 주부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많이 해방되었다. 



그런데 남편이 한국에서 해주었던 부분들까지 내가 다 해야 해서 서서히 부담이 되었다. 

예를 들어 화장실 청소, 의도치 않게 자주 한 이사 전후로 모든 고지서 처리, 집주인이나 렌트 회사와의 분쟁해결, 장보고 아이들과 무거운 짐 또는 택배 끌고 오기, 빠듯한 예산 쪼개 살기, 아이들 문제 상의 등등.



남편이 그동안 해왔던 것들을 당연히 그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내가 직접 해보니 그것도 힘든 일이었다.     



이 2년이란 시간이 나에겐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고, 다시 시작할 힘을 충전하고, 

같은 갈등이 다시 생겼지만 이후 4년을 살아가며 다듬어가고 있다.     



완벽한 가정은 없다. 

다만, 가족 구성원의 노력과 자각 여부에 따라서 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고,

우리 모두에게 깨우침을 준 

기러기아빠로서의 시간을 버텨준 남편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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