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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숙성

묵은지

by freetime

수첩에 적는 걸 좋아합니다. 별로 쓸모도 없어 보이는 글도 쓰고, 다시 보면 무슨 글자인지 알 수도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나고 보면 피식 웃음이 날 정도로 허무 맹랑한데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을 가진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샤프로 수첩에 뭘 적는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샤프의 흑연이 종이와 마찰에서 나는, 사각 거리는 소리도 참 좋습니다. 그 느낌 때문에 적고 싶기도 합니다. 적을 게 없어서 아쉬울 때가 더 많습니다.


얇고 작으며 가벼운 수첩을 좋아합니다. 들고 다니기 편한 것도 있는데, 수첩을 빨리 교체할 수 있고 그때마다 성취감을 자주 느낍니다. 3년 동안 도전해서 올해 브런치 작가가 되었습니다. 수첩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좋아하면서 했던 일을 좀 더 돌이켜 보고, 생각나는 대로 자주 꾸준히 그 과정을 적었습니다. 제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 과거의 제가 적은 글이 길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휴대용 인생 나침반


글을 쓰기 위해서 주제를 고민합니다. 쓸게 없기도 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받아 쓰기만 하고 암기만 하던 제가 저의 생각을 적는 게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때마다 수첩을 봅니다. 과거의 저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이 수첩, 저 수첩 보면서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별로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여러 가지 소재를 읽다 보면 머리가 더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물도 마시고 멍하게 있습니다. 그냥 시간을 보내면서 글에 대한 생각을 잠시 미뤄 둡니다. 제 의지와는 다르게 아까 수첩에서 읽었던 글들이 머릿속에서 숙성됩니다. 신기하게도 어는 순간 생각이 정리되고 글의 방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머릿속에 맴돌던 글이 정리가 되면서 글을 쓸 준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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