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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un 20. 2020

4-12. 달과 손가락

영원회귀 사상의 모순을 극복하는 법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모순적이다. 첫째, 내가 스스로 과거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 이 삶이 처음이 아니라 무한 번째라면. 과거의 나는 이미 무한 번이나 바보 같은 삶을 살았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나 또한 과거의 삶을 반복하게 되는 거 아닐까. 이제 와서 내가 바꿀 수 있을까. 바꾼다면 미래의 무한한 ‘나’들은 바보 같은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둘째, 어차피 나는 내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삶을 다 무한히 반복적으로 살게 되지 않을까. 내 몸을 이루는 것 또한 우주의 일부분인 원자들의 일정 합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무한한 시간 동안 구현할 수 있는 모든 조합을 다 실현해 볼 테고, 따라서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모든 다양한 삶을 무한 번 살아왔을 것이니,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셋째, 내가 스스로 우주의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주의 모든 존재와 사건을 각 원자들의 운동과 변화로 이해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무슨 수로 원자들의 운동을 다르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나 또한 이 광활한 우주의 아주 작은 구성 요소일 뿐인데. 나에게 그런 힘이 어디 있는가. 정말 내가 마음을 다르게 먹고 다르게 행동하면 나의 세계는 달라질까. 아니, 애초에 내가 다르게 마음먹을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우주의 균열이, 존재할 수 있나.


위 세 가지 의문점은 다음과 같이 하나로 종합할 수 있다. 물질적 우주와 도덕적 세계의 충돌. 혹은 과학적 범주와 형이상학적 차원 사이의 균열. 하지만 니체는 의도적인지 어떤지 그 모순을 간과한다. 자신도 봉합할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봉합할 필요가 없었던 걸까. 그래서 영원회귀 사상에 대해 후대에 많은 학자들이 저마다의 해석을 남겼다. 몇 가지만 보자.


우선, 니체를 서양 철학의 연장선에서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서 니체는 끝내 칸트와 헤겔의 이원론적 철학을 극복하지 못한 인물로 간주된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서도 세계는 둘로 나뉘어진다는 말이다. 물질로 구성된 자연우주와 의지로 충만한 형이상학적 도덕 세계. 여기서 인간은 후자의 영역에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둘째, 영원회귀 사상을 비유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을 통해 세계의 자연과학적 원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만의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전하고자 한다는 의미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만 보면 된다. 손가락을 치워야 한다. 영원회귀 사상은, 가르침으로 가기 위한 길이요 장치일 뿐이다.


셋째, 애초부터 니체는 인과론적 우주를 가정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과학주의를 비판했다는 입장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원자는 저마다의 ‘의지’를 가지며 모두 그 ‘의지’대로 움직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처음부터 니체의 우주는 형이상학적이었다. 그 우주 속에서 인간 또한 자신의 주체성에 따라 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타당하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굴레를 벗어난 개인을 주창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처음부터 영원회귀 사상을 물질적 세계나 형이상학적 세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레벨로 간주하는 관점이다. 니체는 모든 전승을 싫어했다. 과거라는 이름의 역사, 전통과 관습, 도덕과 종교 등을 혐오했다. 그리고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너무나 과거라는 이름의 안전한 울타리 속에 살려고 했다. 니체는 그들의 억압적인 삶을 비판했다는 거다.


할아버지의 삶이 아버지의 삶이 되고, 아버지의 삶이 곧 내 삶이 되는 공동체라는 이름의 굴레. 거기에 온전한 나만의 삶은 없다. ‘인간’이라는 보편적 명칭만 존재할 뿐이다. 모든 구성원의 삶이 하나의 거대한 바퀴 속으로 녹아드는 양상. 그것이 공동체주의다. 그것이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다. 그 ‘녹아듦’으로부터 각 개인을 구출하려는 작업. 그것이 니체가 줄곧 해왔던 작업이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결과는 다음으로 수렴한다. 결국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건, 위버멘쉬가 되라는 것. 사회가 짊어준 짐도 벗어던지고, 남들이 갔던 길 혹은 남들이 가라고 시키는 길에서 박차고 나와,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가라는 것.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다른 어떤 이의 평가와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내면을 믿고 그에 충실한 삶을 의지적으로 살아가라는 것.


내가 딛고 서 있는 토대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옛날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과거의 토대 위에 서있었던 이유는, 그곳이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그곳은 정말 안전한가? 아니, 안전을 위해 모든 가치를 포기할 것인가? 다시 질문하자. 우리는 안전을 위해 사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살기 위해 사는 게 된다. 하지만 동어반복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다.


과거에 남이 만들어 놓은 토대를 싹 다 박살내야 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나만의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니체를, 철학의 이론가가 아니라 사상의 실천가라고 부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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