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의미

의대생 증후군

by 이태이

차트 분석/기술적 분석이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 가장 먼저 접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은 골든크로스였다.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다. 이런 게 다 있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5일선-20일선의 골든크로스를 찾아다녔다. 마침 내가 사용하는 D사의 HTS에는 5-20선 골든크로스 종목을 찾아주는 탭이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종목이나 있었다. 먹잇감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때는 물 반 고기 반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금방 수정되었다. 가끔 수익을 보기도 했지만 골든크로스만 보고 매수하기엔 부족했다.


이후에는 20일선-60일선 골든크로스에 주목했다. 그 역시 HTS에서 자동검색됐다. 5-20일선 골든크로스보다는 좋아 보이는 차트가 많은 듯했지만, 5-20일선 골든크로스든, 20-60일선 골든크로스든 그 자체로 차트를 판단하기에는 무리임을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마침 한창 읽고 있던 책에서 거래량이 평소보다 몇 배 이상 나오면 상승 확률이 높아진다는 대목에 꽂혀있던 차에, 우연히 들어간 리딩방에서도 주인장이 자신은 오직 거래량만 본다고 공지해 놓았더랬다. 그때부터 네이버증권에 들어가 한창 거래량 상위 종목만 기웃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었던 게, 거래량 상위를 볼 게 아니라 거래대금 상위를 봤어야 했다. 천원대 주식과 만원대 주식과 십만원대 주식의 거래량이 같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천원대 주식은 하루에 1억 주 이상 거래량도 터지던 때였다. 2-3만원 이하의 주식은 천만 주 단위 거래량은 기본이었다. 그런 호시절에도 10만원 이상인 주식이 천만 단위 거래량이 터지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때는 거래량과 거래대금의 차이조차 생각지 못했던 햇병아리, 아니 달걀이었다.


본격적인 기술 분석서를 사서 보니 골든크로스니 거래량이나 그런 건 진짜 그냥 기초 오브 기초였다. 영어로 치면 a, b, c 같은 거였다.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알파벳의 발음법을 알고 기뻐하던 초등 시절이 생각났다. 이후 샛별형, 상승 N자형, 울타리형, 돌파매매, 고가놀이 등 다양한 기법들이 나를 유혹했다. 가장 내 마음을 끈 것은 샛별형이었다. 꽤 오랜 기간 샛별형 패턴을 찾아 모았고, 매수도 많이 했다. 확실히 유의미한 패턴인 건 맞았으나 매수 시기를 정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이었다. 샛별형 패턴 이후 매수했다가 별 반응이 없어 매도하고 나면 귀신같이 오르곤 했다. 하지만 샛별형을 보이는 차트는 정말이지 차고 넘쳤고 그 중에 옥석을 가르기는 점점 어려워만 갔다.


이렇듯 나는 새로운 기법을 배울 때마다 한동안 그 기법에 천착하곤 했다.


의과대에서 유명한 심리 이론이 있다. 소위 '의대생 증후군'이다. 많은 의대생들이 새로운 병과 증상을 배울 때마다 저마다 자신이 그 병에 걸린 것 같다며 착각한다. 이는 확증편향과 과잉일반화에 따른 대표적인 인지 왜곡이다. 꼭 의대생이 아니어도 일반인들도 한 번쯤은 겪는 현상이기도 하다. 나 또한 공부하다가 우연히 새로운 질병을 알게 되면 혹시 나도? 하는 의심과 걱정을 했던 적이 적지 않다.


차트를 공부하고 기법을 배울 때마다 내가 특정 패턴에 탐닉하게 되는 이유도 실은 그 같은 심리적 오류와 맥을 같이 한다. 골든 크로스니, 상승N자형이니 이런 기법들은 이미 몇 십 년 전부터 있어왔던 것들이다. 다만 나는 그것들을 처음 접했기에 마치 세상에 나만 아는 비밀처럼 느껴졌던 것뿐이다. 이는 대단한 망상이자 착각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여린 가슴은 그걸 느끼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나만 아는 비밀은커녕 세상 모두가 다 알고 있어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박물관에서나 마주할 법한 구닥다리 전시물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재밌는 건 철학이나 과학 같은 걸 공부할 때도 나는 심각하게 그런 증상에 빠진다는 점이다. 한동안 양자 역학에 푹 빠져있을 때는 세상만물이 다 그렇게 보였다. 여기서 '그렇게'의 의미는 정확하게는 양자 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학파의 해석을 비롯해, 평행우주 이론적 접근, 그리고 시뮬레이션 가설적 관점을 포함한다. 게다가 최근 10여 년 가까이 쏟아져 나온 관련 영화나 드라마 등의 작품이 그러한 나의 상상에 터보 엔진을 달아주었다. 여전히 지금도 나는 그런 세계관을 지닌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다만 그 강도나 열정은 많이 사그라들었다.


철학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인문학 계열 중에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중증의 시초였다. 프로이트를 읽고부터는 어떤 콘텐츠를 보든 다 그렇게 보였다. 죽음 충동과 성 충동의 대립이라든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또다른 유비라거나, 초자아와 이드 사이에 낀 자아의 내적 갈등이든가. 그런 식으로 독해되고 분석되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뇌가 스스로 자동화해서 그렇게 해석해 버릇 했다.


이게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 줄 알았는데, 이후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배우면서 훨씬 더 중증 말기로 발전했다. 이제는 모든 게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중층 구조로 보인다. 눈치 챘겠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전반적인 관점도 라캉적인 세계관에 기반한다. 심지어 한 챕터는 차트와 주식 자체를 라캉적으로 해석해 놓지 않았나.


더 나아가서는 이 책의 시도 자체가 그와 같은 확증 편향의 산물이기도 하다. 줄곧 철학책을 읽고, 비는 시간에는 차트를 보다보니, 차트를 볼 때마다 철학적인 이론과 겹쳐보인 탓이다. 글을 쓰기 전에 친구 몇몇에게 주식과 철학을 접목한 책을 쓰려 하는데 어떠냐 물어보니, 모두들 나를 외계인 보듯 쳐다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 기괴하다는 건 그만큼 새롭다는 거겠지. 아무도 하지 않은 사소한 시도를 하는 게 애초에 내가 글을 쓰겠다는 지향이자 목표였으니 그럼 된 거야. 그러한 자기 위안이 지금도 키보드를 두드리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다시 주식으로 돌아가자면, 기법을 배울 때마다 탐닉하는 기간을 가지는 것은 좋다. 다만 거기에 너무 매몰되면 안 된다. 내가 배운 기법이라는 틀에, 너무 캔들과 지표를 구겨넣는 건 아닌가 의심도 하며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둘 줄 알아야 한다. 기법은 수단일 뿐이다. 본질은 눈앞의 차트다. 차트가 먼저고 기법은 나중이라는 말이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내가 배운 철학 이론을 너무 현실에 적용하려 들면 오히려 현실을 소외시키는 반철학적 태도를 지니게 될 수도 있다. 그러한 대표적인 케이스가 맑시스트들이다. 맑스 이론이 그들 각자의 마음에 이상을 불 피웠고, 그들은 자신의 이상에 맞춰 현실을 재단하려 했다. 그 결과가 지난 20세기 동안 세계사가 보여준 파란이었으니. 철학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틀일 뿐, 그것이 현실을 압도해선 안 된다. 그런 거리두기가 지금의 나에게도 그리고 이 시대에도 절실하다.


Q. 하나의 캔들에는 저마다 의미와 의도가 있다. vs 각 캔들과, 캔들이 그린 차트는 주식투자자들 각자의 선택 합으로 만들어진 우연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지나친 의미 부여는 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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