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물생심

버클리의 경험주의

by 이태이

오전 9시가 되면 늘 희비가 엇갈린다. 내가 산 종목이 오르지 않는다. 사지 않고 후보로 둔 종목 중에 태반은 오르는 중이다. 배알이 꼴린다. 상위 종목을 찾아본다. 이미 우주로 떠나버린 종목이 십 수 개는 된다. 초조함이 엄습한다. 어쩌자고 오르지도 않을 종목을 좋다고 확신하며 매수했는지. 아니, 왜 내가 사지 않은 종목들은 저리도 잘 오르는지. 지금 이 순간, 아니 매 순간 나를 빼고 우주여행을 떠나는 종목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패배감이 밀려온다.


나의 안일함을 탓하며, 나의 안목 없음을 욕하며, 그러게 평소에 공부 좀 더 해두지 그랬어, 자책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난데없이 스캘퍼로 전환해버리는 때도 있다. 결과는? 당연히 처참하다. 준비되지 않은 선수에게 메달은 주어지지 않는다. 불기둥에 올라타 온몸을 새까맣게 태우기만 할 뿐. 그러고 또 자책. 왜 홧김에 손가락 놀음 했냐며. 자신의 스탠스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다짐한다. 온몸이, 아니 온 계좌가 너덜너덜해진 채.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덕분에 유명해진 저 말은, 300년 전쯤 아일랜드 철학자(겸 신학자) 조지 버클리가 했던 말이다. 버클리는 극단적인 경험론자였다. 저 달은 내가 보고 있을 때만 존재하고, 내가 안 보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무도 감각하지 않으면 그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저 말의 뜻도 실은, 숲에서 트럭만 한 나무가 쓰러졌다 한들 아무도 듣지 않았다면 쿵 소리가 안 난 거라고 말하고자 했던 것. 누군가가 아무도 듣지 않았어도 쿵 소리는 났다고 반박한다면, 버클리는 그걸 증명해보라고 재반박했다. 당연히 아무도 듣지 않았으니 증명은 불가능하다. 지금으로 치면 원천봉쇄의 오류지만, 그 당시 버클리의 논의는 상당한 무게감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위안은 어떨까. 내가 매수하지 않은 종목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보고 있지 않는 종목들도 역시 세상에 없는 거라고. 다른 종목이 오르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니 관심을 꺼버리면 되잖은가. 사실 투자자에게 이 정도 마인드 컨트롤은 기본이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은 주식에 너무 맞아떨어지는 격언 같다.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보고 있으면 나방이 안 되고 버틸 수 있는가. 호가창에 빨간색 매수 체결량이 빛의 속도로 찍혀 올라가는 걸 보노라면 눈이 뒤집히지 않는가 말이다. 특히 초보 시절일수록 더더욱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 빼고 다 헬-지구를 떠나려고? 안 돼. 같이 가! 그 환장할 거 같은 마음을 누구나 다 느껴봤을 것이다.


차트는 인간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동시에 안겨준다. 욕망과 공포. 호가창도 마찬가지다. 사실 순간적인 욕망과 공포를 주는 건 분봉 차트와 호가창이다. 가격은 미친 듯이 널뛰고 백, 천, 만 단위의 체결량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체결창에 밀려내려간다. 욕망과 공포도 같은 속도로 내 마음 속에 켜졌다 꺼지며 반짝반짝한다. 공포가 욕망을 이기면 다행이지만, 욕망이 공포를 압도하면 게임 끝이다. 매수 버튼을 눌러버린다. 체결되고 약간은 오른다. +1%, +2%. 이쯤 되면 공포는 사라지고 환희와 욕망이 뇌를 지배한다. 더 더 더. 더 가란 말이야. 하지만 거기까지다. 분봉차트는 급속도로 파란봉을 만들어내고, 호가창에는 천 단위에서 만 단위의 파란색 체결량이 미친 듯이 찍힌다. 어떡하지. 욕망은 소멸하고 그 커다란 빈 자리를 압도적인 공포가 점령한다. 몸은 마비되고 손가락은 매도 버튼을 누르지도 못한다. -5%, -10%가 되면 뇌는 이미 하얗게 표백된 후다.


이런 경험을 몇 번 겪으면 이후에는 깨달음이 온다. 호가창 따위 거들떠도 안 봐야지. 분봉 차트도 안 봐야지. 아예 창을 꺼버려야지. 그리고 일부러 다른 일에 집중한다. 견물생심. 반대로 말하면, 보지 않으면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마음을 컨드롤하려면 감각 정보를 먼저 조절해야 한다. 내가 없는 증권시장에서 불기둥이 솟는다. 앆!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Q. 내가 매수한 종목만 신경 쓰면 돼. 다른 종목엔 눈길조차 주지 마. 계속 신경 쓰인다면 아예 창을 꺼버리라구. vs 내가 매수하지 않은 다른 종목들에도 관심 가지고 예민하게 포착해야 해. 지금은 시기를 놓쳤지만 조만간 또 좋은 기회가 올지도 모르잖아. 또 지금의 케이스가 좋은 공부가 될 거야. 그러니 매수하지 않은 종목들도 유심히 지켜 봐. 불 타는 차트와 호가창을 보면서도 감정을 다스릴 수 있어야 진정한 고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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