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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May 20. 2018

1-13. 다윈 VS 멘델

억울한 다윈과 안타까운 멘델

생물학에서 다윈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있다. 유전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레고르 멘델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한 때가 1859년, 멘델이 유전의 법칙을 발표한 시점이 1865년이다. 고작 6년 차이. 놀랍게도 둘은 동시대인이었으며 멘델은 다윈의 열렬한 팬이었다. 멘델의 사후 그의 방에는 엄청난 밑줄과 메모가 적힌 『종의 기원』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그는 생전에 다윈에게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그렇다면 다윈은 멘델의 존재를 알았을까? 슬프게도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윈 사후 그의 방에서 멘델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뜯지 않고 동봉된 채였다. 읽지 않았다는 말이다. 왜 그랬을까. 사실 멘델의 본업은 학자가 아니라 가톨릭 사제였다. 그는 수도원에서 부업처럼 완두콩을 연구했다. 그래서 1865년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논물을 제출했을 때 정작 학계에서는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연구물이었음에도 말이다. 아마 다윈도 죽기 전까지 멘델의 연구를 알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생물학계에서는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다윈이 멘델의 연구를 알았다면, 그의 편지를 읽었다면, 다윈은 당시 자신이 제대로 답하지 못한 질문들에 보다 직접적이고 깊이 있는 답변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남은 생에 그의 연구는 다른 결과를 낳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랬다면 생명공학 연구는 지금보다 30-40년은 앞당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이 무의미하므로, 다윈이 못 다 한 답변은 후대 학자들이 늦게나마 대신한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또 다른 더 안타까운 점은 다수 사람들의 다윈에 대한 오해다. 그것은 이미 ‘진화’라는 표현에도 내포되어 있듯, 최초의 생명체에서 현재의 인간까지 오는 일련의 과정을 발전·개선·성장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윈의 의도는 정반대다. 다윈의 진화론이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비교·비유될 만한데,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을 빼버렸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인간을 다른 동물·생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우수하고 훌륭한 발전된 타입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윈의 진화론을 이제 막 배운 학생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그럼 동물원의 원숭이도 몇 만 년 지나면 인간으로 진화하냐고 말이다. 다윈 입장에서든 현대 진화론자의 입장에서든 그건 미친 소리다. 왜 반대로는 묻지 않는가. 인간이 몇 만 년 후에 원숭이로 진화할 수는 없냐고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고양이와 개는 분명 어느 시점까지 같은 조상을 지녔다가 각기 다른 종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시간이 지나 개가 될 수 있을까. 그 반대는 가능할까. 정답은, 둘 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고양이도 개도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 열등하다 판단할 수 없다. 다만 둘은 각자 제갈길을 걸어온 것뿐이다. 현재 살아남은 모든 생명종이 다 마찬가지다. 세균부터 인간까지 각자 생존의 길을 살아왔을 뿐 세균이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오히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보다 세균이 훨씬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생존과 번식을 한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다윈은 그 모든 것이 환경에 따른 상대적 적응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윈의 생각을 오독한 것은 1차적으로 그의 추종자 토마스 헉슬리와 그들의 사유를 사회학에 끌어들인 허버트 스펜서 등의 사회진화론자들이다. 사회진화론자들은 다윈이 말한 자연선택을 도태와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했다. 약한 생명체는 죽고 강한 생명체가 살아남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자연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도 적용했다. 인간 사회의 각 집단과 공동체 또한 마찬가지로 약하면 멸종하고 강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들은 그것이 필연이며 올바른 현상이라고까지 주장하게 된다. 그 생각의 결과가 제국주의 옹호와 두 번의 세계대전이다.


세계의 강자가 세상을 지배하며, 약자는 그들의 지배를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 세상을 지배하는 유럽을 비롯한 서구는 강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명분을 가지고 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등은 약자이기 때문에 서구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과 같은 길을 뒤따라야 한다는 변명. 다윈의 진화론이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사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하지만 거듭 말하건대, 그것은 다윈의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생각이다.


흥미로운 것은, 제국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이 인기인데 반해 식민지에서는 멘델의 유전 법칙이 흥행(?)했다는 점이다. 아마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식민지배를 당하는 쪽에서는 자신들이 약하기 때문에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는 이론적 토대가 필요했는데 마침 멘델의 이론이 그와 부합했기에 열광하지 않았을까 하는. 멘델의 유전 법칙인 ‘독립 법칙’이나 ‘우열의 법칙’ 등은 그들이 찾던 적합한 사유였을 것이다. 가령 완두콩에는 녹색 또는 노란색 형질이 있는데 그 형질 중 어느 것이 객관적으로 우월하다 열등하다 판단할 수 없으며, 그 두 형질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멘델이 주장했으니 말이다. 그 법칙들을 환원하면 서양이든 동양이든 어느 쪽도 우열을 가릴 수 없으며 두 세계는 완전히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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