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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May 28. 2020

4-05. 철학의 끝판왕을 격파하다

칸트와 헤겔을 비판한 니체

칸트의 위대함은 자기 시대까지의 철학적 논쟁을 강제종료 시킨 데 있다. “신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칸트는 “알 수 없다”고 답한다. “이 우주가 정말 존재하나요?”라는 질문에도 칸트는 “알 수 없다”고 답한다. 아니 이 양반은 대체 어쩌자는 걸까. 일단 칸트 얘기부터 들어보자.


칸트에 의하면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신이 있든 없든 인간에게는 이성적 능력이 있으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도덕법칙을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1+1은 몇인가? 이 세상 누구에게 물어도 답은 2다. 인간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행동이 선한지 악한지를 판단하는 것은 이성적 판단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그것은 모든 인간들의 타고난 능력이다. 쉽게 말해 어떤 상황에서 가장 도덕적인 행동을 이끌어내는 추론 과정 또한 수학적 계산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 판단을 통해 하나 도덕법칙을 합의할 수 있으며, 그걸 ‘절대선’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느냐는 게 칸트의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세상만사가 이성의 합리적 법칙에 입각해 움직인다면 선 또는 악을 택할 필요조차 없어지는 거 아닌가? 나의 선택과 행동 또한 자연 법칙에 따른 과거 사건들의 총합일 뿐일 테니, 나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잉여의 틈은 발생하지 않게 된다. 그것이 라이프니츠적인 사고방식일 텐데, 칸트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칸트는 신뿐만 아니라 우주 자체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고 답한다. 있든 말든 상관없다는 거다. 왜냐하면 적어도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으로 지각되며, 그 지각되는 우주의 양태 또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감각기관을 지니고 태어나므로 감각적/인식적 프레임 또한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불편없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실재 세계에 대해선 알 수 없으나,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의 상에 대해선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정리하자. 우주 자체가 합리적·인과적 자연법칙을 따르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주가 합리적·인과적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으로, 인간이 인식할 뿐이다. 우주의 법칙은 우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우주에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 속에서 개인이 행할 행동의 몫은 오로지 각자에게 달렸다.


이로써 칸트적 세계관에서 세계는 둘로 쪼개진다. 인간의 인식 대상으로서의 물질적 세계와, 인간 스스로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게 될 형이상학적 세계로 말이다. 후자의 세계에서 인간은 ‘자유 의지’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플라톤에서 데카르트로 이어지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칸트 또한 그대로 물려받았다.


니체는 칸트가 사고의 전복을 꾀한 게 아니라 사고의 유희를 즐긴 것뿐이라고 비판한다. “신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든다”는 과거 사람들의 생각을 “이성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든다”는 발상으로 칸트는 전복시켰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그것은 명칭만 바뀐 것뿐이다. 기존의 신을 절대선으로 바꾼 것뿐이니까.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을 주관하는 절대적인 도덕법칙이 존재할 수 있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칸트는 답하지 못한다. 인간이란 정말 모두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동일한 사고과정을 거쳐 똑같은 도덕법칙에 도달할 수 있는 건지 그는 답할 수 없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도덕 법칙과 인간의 이성적 능력은 원래 주어진 거라고 말이다.


“신이 있다.” “도덕 법칙이 있다.” “인간에게 이성적 능력이 있다.”는 명제는 니체에게 근본적으로 동일한 레벨에 속한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면 나머지 것들 또한 마찬가지여야 한다. 원래 주어진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왜 나머지 것들은 증명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그러므로 칸트는 기존의 철학적 논쟁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얼렁뚱땅 타협한 것에 불과하다는 게 니체의 진단이다. 그것도 말장난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니체에게 칸트는 전복의 철학자가 아니라 기존 철학의 수호자인 셈이다.


물론 니체가 위와 같은 생각을 혼자 해낸 건 아니다. 역시 그는 자기 시대의 선배 철학자들에게 많은 생각의 씨앗을 얻었다. 대표적으로 슐레겔이나 슐라이마허 등의 낭만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칸트가 도덕법칙이라는 보편성만 강조하느라 각 개인이 가져야 마땅한 고유성을 덮어버렸다고 비판했다. 칸트가 맞다면, 지구의 모든 인간들이 똑같은 이성적 능력을 발휘해 하나의 도덕법칙에 도달할 테니, 지구인이 몇 명이든 결국 한 사람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 생각을 완성한 자가 헤겔이다. 모든 존재는 이성에 따라 움직이므로 결국 우주는 이성 자체가 활동하는 말놀이판이 된다. ‘본질’은 이성이고, 우주를 비롯한 모든 인간 활동은 ‘현상’이 된다. 인간은 이성이 움직이는 말놀이판의 말이다. 스피노자가 인간을 신의 조각이라 봤다면, 헤겔은 인간을 이성의 조각이라 본 셈이다. 이래서는 ‘나’란 존재가 가진 고유한 가치는 전체에 함몰되고 만다. 니체는 수많은 ‘개념’에 파묻힌 ‘인간’을 구출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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