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비워야 잘 채울 수 있다

매일 기록하기, 그게 무엇이든 - 8일 차

by 가영
에너지를 완벽하게 소진시켜야 풀충전을 할 수 있다.

온몸이 저전력모드 상태인 것 같아... 집에 오면 일단 잠시 앉았다가, 곧 눕는다. 그 자세로 1시간, 2시간이 지나도록 주저앉은 몸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주저앉은 것이 몸인지, 마음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 일어나야 할 때가 되면 폰을 들고 음악 하나를 골라서 튼다. 음악 하나만 듣고 일어나자, 일어나서 빨래도 개고, 옷장에 넣고, 일기도 쓰고 하자. 그리고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한로로의 금붕어가 나오고, 김뜻돌을 지나 검정치마까지 5곡 정도는 더 듣고 나서야 벌떡, 박차고 침대에서 일어난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나면 갑자기 부엌에서 요리를 한다. 왜 갑자기 요리를..? 출근해서 아침에 먹을 오버나이트 오트밀을 만들거나, 언젠가 릴스 다이어트 베이킹 레시피로 봤던 아몬드가루&땅콩버터 빵을 만든다. 곧 에어프라이기에서 고소한 빵냄새가 올라오면 엉성한 재료로 그럴듯한 비주얼을 만들어낸 내가 기특해서 견딜 수가 없다. 더러워진 싱크대를 깨끗하게 닦고,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면 에너지가 완벽히 소진된 채로 잠에 든다.


이전에는 갑자기 요리를 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ADHD야 혹시..? '해야 하는 일'이 충분히 많은데 왜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는 걸까. 평생을 봤지만 아리송한 나의 뇌 속이란.

언젠가 한번 기질검사를 했는데 내가 남들보다 에너지의 통이 크다고 했다. 에너지 통이 커서 밤에 완벽히 이 에너지 통을 비워야 푹 잘 수 있다는 말이다. 결과지를 읽고 나니 아리송한 나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다. 글을 쓰거나 콘텐츠를 만드는 것처럼 기준이 각기 다른 것들은 나에게 단번에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어지러운 집을 깨끗이 치우거나, 세탁기를 돌리거나, 내일 먹을 도시락을 싸는 일은 당장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개운한 결과를 주니까 만족스럽다.



그래, 에너지를 잘 비워야 또 가득 채워 내일도 잘 살 수 있다. 잊었던 삶의 이치를 떠오르며 빵을 구웠다. 빵이라고 할 것도 엉성한 레시피였지만 그게 중요한가. 다음날 뿌듯하게 빵을 먹으며 에너지를 완충한 상태로 집 밖을 나설 나를 상상하며 에너지를 비우고 또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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