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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건 Sep 04. 2022

내 멋대로 우울증 약을 끊은 후

11일 차. 땅 멀미

휴학 기간 6개월 동안 동네 정신과에 다니며, 약 부작용도 없애고 약의 효과에도 익숙해졌다. 기분은  이상 출렁대지 않았고 잠도 잘 잤다. 모든 것이 편안다.


이게 내 원래 상태가 맞아.

그동안 그렇게 나빴던 게 아파서 그랬던 거야.

지금이 원래의 나야.

이런 편안함이 내가 가졌어야 마땅한 감각이었다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생각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우울증이 없었다면, 약 없이도 항상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6개월은 8년간 앓아온 병증이 완전히 호전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8년간 바다에서 표류하다 마침내 땅에 올라상황이나 마찬가지였. 파도 위에서 사는 데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제는 흔들릴 물이 없는데도 파도가 느껴졌다. 흡사 '땅 멀미' 비슷했다.


내 몸과 정신은 아직 땅 위의 편안한 상태, 원래 내가 지냈어야 할 상태에 정착하지 못한 채였다. 약을 끊지 말고 꾸준히 복용하여 편안함을 일상에 고정시켰어야 했다.


그러나 편안함이 원래부터 내 것이었다고 생각하자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에 가야 하는 일이 무척 귀찮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다 떨어졌을 때 내원하지 않았다.


이때 내가 간과한 것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서 말했듯 내가 땅에 완전히 발을 디딘 상태가 아닌, '땅 멀미'를 하는 상태였다는 것.

둘째는 내가 휴학을 끝내고 복학했다는 것.


당연히 집에서 쉴 때보다 학교를 다닐 때 더 많은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일단 자취를 하고, 등교하고, 수업을 듣고, 과제생긴다. 이 정도가 평범한 일상이다.

그리고 일상이 빽빽하면 사건이 필연적으로 생긴다.

자취방에서 빨래를 하다 세탁기가 갑자기 멈춘다거나, 등교 중에 낯선 사람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거나, 과제 제출일을 착각한다거나 하는 사건들 말이다. 이런 작은 사건들이 쌓이고 쌓여 천천히, 밀물이 들어오듯이 다시 우울의 바다로 나를 끌어들일 수도 있다.


땅 위 일상을 잘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반드시 우울증 약을 성실하게 복용해야 한다. 우울증 약을 먹지 않아도 계속 기분이 일정하게 유지될 때까지 말이다.


게다가 내가 약을 끊은 후 공교롭게도 큰 사건들을 겪었다. 4중 추돌 교통사고와 자취방 가스누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둘 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건 아니었다.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때 나는 버스 안에 탑승자로 있었고, 가스누출은 건물의 노화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추운 겨울밤에 원고들이 담긴 노트북을 끌어안고 자취방 건물 주차장에 주민들과 함께 서 있었다. 소방차가 도착하고 소방관들이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나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앞으로 계속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실제로 그런 사건이 더 생기지는 않았다. 다만 내 머릿속에서는 그런 일들이 계속 재생되었다. 밤에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다시 가스 누출 사고가 일어날까 봐, 가스가 누출된 상태에서 누군가 가스레인지를 켜 건물이 폭파될까 봐 두려웠다.


밖을 걸어 다닐 때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후려치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했다.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으면, 칼을 든 괴한이 강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상상을 했다. 어쩐지 상상 속에서 그 괴한은 나만을 찌르려 했다.


자주 집중이 안 되었고, 가끔 숨이 차고 메스꺼웠다. 잠도 집중도 수업도 날 떠나버렸다.

전형적인 공황장애 증상이었다.


나는 다시 병원에 내원했다. 의사와의 상의 없이 약을 끊은 뒤 시간이 좀 지났던지라 초진처럼 상담을 보았다. 나는 약 처방을 받고 선생님에게 물었다.


"그럼 저는 약을 먹어야만 편해질 수 있는 사람인가요? 앞으로 영원히 약을 먹어야 하나요?"


선생님은 날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결건 씨. 세상에는 평생 어떤 약들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당뇨, 알레르기, 천식 같은 것 말이죠. 약을 먹는 것은 결건 씨가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더 잘 살기 위해 먹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평생 먹어야 할지 아닐지 알 수도 없어요. 지켜봐야지요."


우울증 말고 다른 병을 가진 사람들도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약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그래. 의학이 발달된 문명사회에 태어나 좋은 게 뭐겠는가. 일상생활이 어려운 사람들도 쉽게 약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 우울증으로 약을 평생 먹게 된다고 해도 별 것 아니야. 일종의 우울증 알레르기가 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나는 그때서야 내게 우울증 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했다. 다시 약을 먹었고 조금씩 일상을 되찾았다.


내 멋대로 우울증 약을 끊은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내게 약의 필요성을 분명히 알려주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경험이었다. 불안정한 정신상태에서 약을 먹지 않고 일상을 영위하기는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게다가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달리, 우울증 약을 끊어 멍함이 사라진다고 해서 창작이 더 잘 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작품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되었다. 쓸데없는 생각, 걱정, 망상이 집중도를 해치고 효율성을 떨어뜨렸다.


결과적으로 나는 우울증 약을 2년간 성실하게 복용한 뒤 더는 우울증 약을 먹지 않게 되었다. 선생님이 상황 악화로 우울감이 심해지지 않는 이상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진단을 내렸다.

지금 나는 불면증 약만 먹고 있다. 불면증 약도 줄여 보자는 선생님의 말에 천천히 약을 줄여 가는 중이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하냐는 질문은 정말 선생님 말마따나 이른 질문이었던 셈이다.


물론 지금도 가끔씩, 누군가가 무엇이 어떤 일이 나를 무척 우울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당연하다. 원래 인생 자체가 사건이다. 삶을 지내면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 우린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면서 사건을 겪는다. 오늘은 아무 일 없었다고 느껴도, 곰곰이 돌이켜보면 화장실에 휴지가 없었다든가 하는 사건이 있었기 마련이다.


사건이 일어나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다. 다만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지내는가가 관건이다. 그리고 일상의 사건을 더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처리할 수 있게 해 주는 약이 바로 우울증 약이다.


우울증 약은 특별할 것이 없다.

다른 모든 약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을 더 편하게 만들어 주는 약이다.

단지 그뿐이다.

그리고 의학이 발달한 문명사회에 태어나는 운을 얻은 김에 마음껏 이 의학을 이용하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당신이 많이 아프지 말고, 더 일찍 낫고 덜 아프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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