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으로 이사 올 때 잔디 깎기는 남편의 일이었다. 올해는 허리가 아픈 남편을 대신 해 내가 깎는다. 결국 모든 정원일은 내 몫이 되었다.
지난 토요일 아침, 열흘만에 잔디를 깎으러 나갔다. 워낙 정원 돌보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올해는 예초 작업에도 흥미가 생겼다. 남편에게 잔디 깎으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경계를 다듬는 예초기와 수동 잔디깎기를 사용해 잔디를 깎았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나 집에 들어오니 남편이 핸드폰으로 무언가 하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보고 남편이 말했다.
“얼굴이 너무 빨갛네. 더위 먹겠다. 로봇 예초기 사줄까?”
“그거 비싸.”
“생각보다 안 비싼데… 세일하면 사줄까?”
“몇 평이나 깎을 수 있는데?”
“최소 사이즈가 육분의 일 에이커래.”
“그럼 용량이 제일 적은 모델도 이백 평 용이네? 우리 집 잔디밭은 마흔 평도 안될 것 같은데?”
“이웃이랑 같이 써.”
“나 그냥 무선 전동 잔디깎이 사주면 안 돼? 지금처럼 힘으로 미는 것만 아니면 괜찮아. 우리 집 화단은 일자가 아니어서 어차피 예초기 따로 써야 하고 선 없는 무선 잔디깎이면 충분해. 그리고 나 작년보다 힘이 세졌는지 이제 예초기도 안 무거워. 이게 다 ‘노동근’이야.”
나는 굵은 팔뚝을 자랑하듯 들고 말했다. 남편은 더 이상 로봇 예초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까지 하고 있는 내가 안쓰러운지 다시 검색에 들어갔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위시 리스트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전지용 전동톱 사줘. 손가락만 한 체인톱이 달린 전동톱이 나왔더라. 손잡이는 전동 드라이버처럼 생겼는데 크기가 작아서 쓰기 편할 것 같아.”
“그래? 그 정도 크기면 너무 작지 않아?”
“큰 나무 벨 것도 아닌데 뭐, 가벼운 게 좋아.”
“그럼 우리 집에 많이 있는 브랜드로 찾아볼게. 배터리를 함께 쓸 수 있으니 더 싸게 구입할 수 있을 거야.”
검색을 계속하던 남편은 가격 차이가 없다며 자꾸만 더 큰 톱을 권했다. 커다란 나무까지 자를 수 있는 톱은 내가 사용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3kg이나 되는 톱은 사줘도 못써.”
권하는 것마다 설득에 실패하자 남편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남편이 나를 위해 쇼핑하는 품목은 대부분 정원 관련 용품이다. 알고 지낸 시간이 삼십 년인데 명품백은커녕 비닐백 하나 안 사주던 남편이 요즘은 정원 일 할 때 입으라며 옷도 주문해 주고 어지간한 가정용 농기계는 알아서 주문한다. 그 바람에 다용도실 구석구석에 기계들이 놓여있다.
‘남편이 본인은 쓰지도 않을 물건을 왜 자꾸 사는 거지?’
내게는 아무리 비싼 물건을 사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던 때가 있었다. 장을 보러 갔다가 서너 시간을 백화점에 머물며 양손 가득 종이백을 들고 나온 적도 많다. 토너가 떨어져 들른 화장품 매장에서 아직 남은 크림과 에센스, 필요도 없는 색조화장품까지 사 오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렇게 사대도 살 때만 좋을 뿐이었다. 집에 와서 물건을 늘어놓고 보면 허한 마음이 채워지기는 커녕 후회만 가득했다.
비싼 옷, 가방, 신발을 사도 패셔니스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화장품이 나를 예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었다.
한 동안은 쓰지도 않을 노트와 필기구를 사들였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것이기는 하지만 쌓인 양이 너무 많아 ‘저 잉크를 다 마시면 치사량이 되려나? 내가 죽으면 장작 없이 연필과 노트로만 쌓아도 화장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물건으로는 구멍을 채울 수 없었다. 쓰레기로 구멍을 메우려고 하니 내게서 썩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점점 늘어나는 카드대금처럼 내 마음속 구멍의 크기도 더 크고 깊어져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쇼핑을 위한 쇼핑을 하는 날들이었다.
요즘도 여전히 쇼핑을 많이 한다. 대신 품목이 바뀌었다. 정원에 심을 꽃과 나무를 사고 가드닝에 필요한 장갑, 바닥이 두꺼운 양말, 쿠션이 좋은 장화, 편한 옷에 눈이 간다. 예전처럼 비싼 물건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심지어 화장품도 두세 가지 기초 용품만 놓고 쓴다. 근래에 햇빛을 막아줄 모자와 자외선 차단 크림을 추가했을 뿐이다. 책도 많이 산다. 한 권 읽으면 두 권을 사는 바람에 못 읽은 책도 많다. 하지만 쌓이는 책을 보며 나 죽거든 장작 대신 책으로 화장해 달라는 농담은 하지 않는다.
화단 구석구석 심어둔 화초가 자라는 만큼, 쌓인 책을 읽는 만큼 내 마음속 구멍도 메워지는 건지 이제는 내게서 썩는 냄새 대신 꽃과 책으로 만든 향기가 나는 것 같다. 가슴에 불던 바람도 많이 잠잠해졌다.
물건으로 나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틀렸다. 나는 물건으로 표현되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생각과 행동으로 표현된다. 행동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생각을 타인이 읽는 것이다. 둔하기로 유명한 남편도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었나 보다.
어제 이웃집 정원 공사를 도와주러 갔다 돌아오니 남편이 퇴근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손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리 와봐. 도착했어.”
“뭔데?”
남편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립해야지. 여기 설명서.”
10인치 체인톱이 보였다. 조립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물건이 도착하면 항상 박스채 두는데 본인도 궁금했는지 잘 보이게 꺼내 두었다. 톱을 본채에 끼우는 게 다 인데도 둘 다 집중했다.
“어때? 무거워?”
“이 정도는 괜찮아. 맘에 들어. 고마워.”
“쓰기 전에 기름을 넣어야 하는데 따로 사야 하나 봐. 주문했으니 토요일쯤 도착할 거야.”
나는 전동톱을 들고 웃으며 대답했다.
“일요일에 나무 다 자르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
세상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전지도 때가 있다.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해서 정말 다행이다. 내년 봄에 꽃은 못 볼 수도 있겠지만 잘라낸 빈 가지가 잎으로 가득 메워지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