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
2주 전 금요일은 공황장애와 우울증 진료가 있는 날이었다. 처음 반년은 매달 병원에 갔지만 요즘은 두 달에 한 번씩 간다.
진료대기실에서는 보통 책을 읽으며 기다린다. 정신과 진료는 시간이 좀 길게 소요되기 때문에 예약한 시간이 지나서 내 순서가 오는 경우가 많다. 읽던 책을 들고 상담실로 들어가면 보통 그 책 이야기로 진료가 시작된다.
이번 달에는 처음으로 대기실에서 잠이 들었다. 좀 일찍 도착하기도 했고 환자가 많이 밀리는 바람에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갑자기 잠이 쏟아지더니 들고 간 책은 한 페이지도 못 읽고 목이 꺾인 상태로 졸았다.
지난 두 달은 약 용량을 좀 늘이려고 진료를 한 달 앞당길까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처방받은 약도 잘 먹고 비상약도 먹었지만 몇 달 전부터 불안증이 잘 가라앉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약을 더 먹다 보니 수시로 졸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이번 진료 숙제는 에세이 수업에서 쓴 글을 갖고 오는 것이었다. 그동안 쓴 글을 의사 앞에 내밀었다.
“이렇게 많이 쓰셨어요?”
“일주일에 한 편씩 쓰거든요. 그래서 많아요.”
“잘 읽을게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비상약 먹고 원주에 다녀왔어요. 소금산에도 가고 뮤지엄 산에도 갔어요.”
“잘하셨어요. 힘들진 않으셨어요?”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좀 졸렸어요. 그래도 일상생활을 하게 되는 것 같아 좋았어요.”
“그렇게라도 다니시는 게 나아요.”
“그런데 차를 타지 않는 날도 예전보다 더 불안해서 자꾸 비상약을 먹게 돼요. 이제 찬바람도 불고 정원일도 못하는 계절이 오는데 혹시 좀 더 강한 약을 쓰면 안 될까요?”
“추워지면 더 심해지세요?”
“네.”
“지금 두 가지 약 모두 10mg을 쓰고 있죠. 둘 다 용량이 5, 10, 20mg인 제품이 나와요. 하루 세 번 먹는 약을 최대 용량으로 복용하시는 환자분도 있어요.”
의사는 살짝 망설이는 듯하더니 덧붙였다.
“그보다는 아침 약 용량을 높이는 게 낫겠네요. 10mg에서 15mg으로 늘여봅시다.”
별다른 반대 없이 내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처음 진료를 받으러 갔을 때 4개월에서 6개월 정도 약을 먹으며 치료를 받게 되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10개월이 지나도 낫기는커녕 더 심해지는 것 같아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끊을 수 있어요’라며 상태가 조금 좋아지면 하루 세 번 먹는 약을 일주일에 반 알씩 천천히 줄여 보라고 했었다. 줄이는 시도를 했다가 나흘 만에 발작이 왔다. 그 이후 나는 빨리 나아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나아지기 위해 요즘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명상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요. 저 유튜브도 하려고요.”
“유튜브는 안됩니다.”
“친구들이 정원 보고 싶다고 해서 그냥 녹화만 하고 올리는 거예요. 조회수 올리려고 노력하는 것 말고요.”
“그런 건 괜찮습니다. 명상은 어떤 식으로 하세요?”
“앱을 이용해서요. 앱에서 가이드하는 대로 따라 해요. 한참 집중이 잘 되어서 시간을 늘렸었는데 요즘은 10분짜리 세션도 집중이 잘 안되네요.”
“환자분에게 필요한 명상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마세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목표가 있잖아요. 지금은 아무런 목표가 없다고 해도 하다 보면 어떤 종류의 목표든 생기게 돼요. 명상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물가에 가서 물을 5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세요. 나가기 힘드시면 정원의 꽃을 바라보세요. 예전에 꽃을 보며 이야기를 한다고 했죠? 꽃에게 말을 걸지 말고 그냥 5분간 바라보세요.”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시간이 사라지는 것 같고 내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것 같다. 그래서 잠에서 깨면 청소를 하고,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잎에 분무를 하고, 시든 잎을 떼내고, 더러운 잎은 닦고, 화단과 잔디밭에 끊임없이 올라오는 잡초를 뽑고, 죽은 잔디를 긁어내고, 과하게 자란 가지를 자르고, 시든 꽃을 떼고,…. 책을 좀 읽으려고 앉았다가 불안해지면 다시 일어나 할 일을 찾는다.
영화나 드라마도 못 본다. 눈과 귀로 한꺼번에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지만 우선 불안해서 그렇게 긴 시간을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우리 집에 할 일이 없으면 이웃집에 가서 일을 도와주거나 수다를 떤다. 남편이 나를 보며 ‘한시도 앉지 않는다’는 걱정을 할 정도로 움직인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갑자기 쓰러져서 잠이 든다.
“환자분에게는 그게 제일 필요해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친구들에게 보여 주려 얼마 전 찍은 영상이 생각났다. 테이블 위에 카메라를 세우고 바깥 풍경을 찍었다. 화면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만 흐르는 영상이었다. 아이들 입시로 힘들 친구들이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찍은 영상이었는데 녹화를 하는 동안 나는 창문을 열고 영상에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용히 청소를 했다. 그 영상이 내게 필요하다는 생각은 못했었다.
“그렇게 해볼게요.”
진료가 끝나고 두 주 동안 최대한 게으르게 지냈다. 원래 있던 일정을 제외하고는 멍하게 있으려 노력했다. 늘어난 약 때문에 하루 종일 졸린 탓도 있었지만 일부러 침대에 더 누워 있었고 조금 정리가 덜 되어도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잘 되는 날도 있고 안 되는 날도 있었다. 꽃을 보다가 어느 순간 잡초를 뽑기도 하고 멍하게 앉아 있다 눈에 띈 종이박스를 정리하기도 했다. 박스에 붙은 테이프를 뜯고 하나하나 다시 접어 정리하다 보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며 마음을 다독였다.
지난 화요일엔 친구들을 위한 영상을 다시 찍었다. 이번에는 카메라만 정원을 녹화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함께 앉아 정원을 바라보았다.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