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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언두 Oct 05. 2023

당신의 원고를 거절합니다

가을에 어울리는 것들을 생각하며 버티기


지난 7월 31일 무더운 여름, 다리를 무척이나 떨고 싶었던 마음을 기억한다.


처음으로 소설 원고를 완성하고 공모전에 응모를 한 후였다. 6-7년 정도를 마음에 품던 소재였고 수십 번 초고를 썼다. 13페이지 남짓한 길이로 완성된 원고는 달달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한 단어, 한 문장, 한 장면이 소중해서 더 이상 건드리지 못하겠다 싶어 고심 끝에 제출하기로 결심했다. 공모전도 고르고 골라, 규모가 크지 않지만 나의 글을 소중히 대해줄 것 같은 곳으로 선택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작품을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초조한 마음에 다리를 떨고 있는데도 더 떨어야 할 것 같았다. 있는 힘껏 다리를 덜덜거렸다.


제출하고 나니 손바닥 뒤집듯 마음이 바뀌었다. 장면은 왠지 전형적으로 보였고 문장과 대사는 허름해 보였으며, 엔딩으로 갈수록 힘이 빠져 보였다. 글은 그래도 그나마 최선을 다한 듯싶었는데 급하게 작성한 시놉시스는 실수투성이에 바보 같았다. 아무도 내 원고를 귀하게 여겨주지 않을 것 같아 시무룩했다. 그렇다고 멋지게 고칠 시간도, 체력도 없어 축 쳐졌다. 제출한 원고는 고칠 수 없으니 한동안 잊고 지내는 것이 맞는데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고 하릴없이 원고만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원고가 형편없었다. 첫 원고가 쓰레기와 다를 것 없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무상했다. 한동안 우울함에 빠져 그 무엇도 나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



우울함을 헤매던 어느 가을날, 영화 하나를 봤다. CGV 아트하우스에서 9월에 개봉한 <<어파이어>>였다. 어파이어는 입추가 지나고 갑자기 쌀쌀해지는 가을바람처럼 갑작스레 찾아왔다. 아트하우스가 있는 여의도에 간 것도, 혼자 영화를 보기로 한 것도, 더욱이 그 영화를 어파이어로 결정한 것도 모두 즉흥적인 마음이었으니까. 어파이어를 보며 첫 원고에 대한 미련이 조금 옅어졌다. 그건 영화가 가슴에 울림을 주었다는 멋들어진 이유는 아니었고 그저 나와 닮은 어파이어의 주인공, 레온의 모습이 못나보여서였다.


레온도 나처럼 자신이 써낸 원고에 확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첫 번째 소설을 출간하고 두 번째 소설을 준비하고 있는데, 자신의 새로운 원고가 형편없다는 것을 알지만 포기하지 못한다. 모두 힘든 순간을 겪어봐서 알겠지만 마음에 작게 피어난 불만은 신경 쓰지 않으면 불길처럼 커져 우리의 모든 순간을 잠식시키는 법이다. 레온도 마찬가지였다. 별장을 15km 남기고 고장 난 차, 갑작스레 별장에 같이 머물게 된 나드야, 밤마다 알 수 없는 남성과 격렬한 밥을 보내는 나드야의 신음소리,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매력적인 나드야의 모습, 건너편 숲에서 번져오는 거대한 산불, 그로 인한 자그마한 불편들, 레온은 모든 게 불만이다. 여름동안 친구의 별장에서 지내면서 그는 자신만의 부정적인 세계에 빠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무례한 말을 내뱉고 투덜거린다.  레온의 친구와 나드야는 레온의 못난 모습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

캄캄한 영화관 안에서 레온과 그의 친구들을 보며 혼자 얼마나 얼굴을 붉혔는지 모른다.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글을 쓴다고 하면서 나의 시야는 얼마나 좁았는가. 그 상태에서 쓴 글을 누가 읽고 싶을까. 주변 사람들은 나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많은 말들을 삼켰을까.



가을에 떠올리는 여름날의 나는 너무나 못났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어리숙한 작가일 때 수많은 시간을 쏟은 원고가 쓸모 없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런 순간에 좌절하는 것 또한 필연이기에.


딸기가 점점 썩어버렸다
그런 당연한 일들이 벌어지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맨 처음 딸기를 수북하게 담은 날이 떠올랐다

누구의 집이었지
재미없는 삶이었지
아니 달콤한 말이었지
생경한 거실 한복판에서 멍이 든 손목을 내려다봤다

찬장에 이가 나간 그릇이 쌓여갔다 냄비는 손잡이를 잃고 칼은 무뎌졌다 책이 글자를 지우거나 다 타버린 초가 바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먼지와 털이 구르는 동안 초침은 타닥타닥 제자리만 걸었다 저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 이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딸기를 짓이겼다
손가락이 부풀었다

일상은 썩어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거구나
당연한 걸 늘 까먹고 말아서 이렇게 쉽게 멍들어버리는 거구나
방문 손잡이가 덜그럭 덜그럭 돌아갔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손가락을 데었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딸기 아래엔 구더기가 있고 구더기 아래엔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물컹거리며 달콤해지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침묵과 침묵 사이에서 말 못한 사연은 끈적하게
상처에 달라붙었다

너무 간지러워 긁고 또 긁었다
이것을 부스럼이라 부를지 부질없음이라 부를지
인간 대신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면 딸기 같은 것도 좋지 않을지
끈질기게 들러붙어 남에게 깨알 같은 흔적을 남길 수 있으니

그러니까 지금 나는 새로운 딸기에 진입한 거구나

새하얗고 여린 열매로서
건넌방에 웅크린 짐승에게 다가갔다

이제야 알겠어보듬보듬 이마를 매만지면
갓 따온 딸기 향이 죽을 만큼 방안에 채워진다는 것
사랑과 세균이 범벅된 채 몸은 없어지고 만다는 것
그리하여 이번 삶에선 증오를 내버려두기로 했다

_한연희, 「딸기해방전선*」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레온은 친구들의 쓰디 쓴 조언에도 자신의 못남을 완전히 깨닫지 못한다. 자신의 슬픈 실패에 매몰되어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다 결국 모든 것을 잃는다. 그의 새로운 원고는 편집자에게 거절당하고, 나드야는 레온을 이해하려 애쓰지만 그의 이기심에 질려버리며, 친구는 어느새 별장 근처까지 번져버린 산불을 피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의 곁에는 더 이상 빛나는 소설도, 사랑스러운 그녀도, 오랜 친구도 없다.


하지만 다행히 레온은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지난여름을 추억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글을 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름을 담담하게 소설로 옮긴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야 피어난 이야기는 이전의 원고와 달리 꽤 읽을만하다. 그런 그 앞에 사랑스러운 나드야가 다시 나타난다.


우리에겐 언제나 '딸기가 무르'는 때가 온다. 레온의 두 번째 소설이 형편없었듯이, 귀하게 써낸 나의 원고가 갑자기 허름해 보였듯이.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 좌절의 시간 동안 '말 못 한' 우리의 고통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깨알 같은 흔적'이라도 남길 것이다. 레온이 절망의 끝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피워냈듯이, 내가 지친 이야기로 위로를 받는 당신이 있듯이. 언젠가 '새로운 딸기로 진입'할 그날을 위해 우리가 못났던 시간을, 세상이 끝날 것만 같던 좌절을 미워하지 말자. '증오는 내버려두'고 그냥 '보듬보듬' 여린 우리를 매만져주자. 선선한 날씨에 여름을 추억하는 건 가을에 어울리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 무른 딸기가 깨알 같은 흔적을 남기는 건 가을의 것이 분명하니까. 그러면 우리의 삶은, 또 우리의 글은 '갓 따온 딸기 향이 죽을 만큼 방안에 채워'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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