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화분을 보내던 날
처음 화분을 심었던 씨앗이 시간이 지나도 지나도 소식이 없어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발아하지 못함을 받아들이고 말았던 날이 기억난다. 20대 중반을 막 넘기던 그때의 나는 기다림과 단념이라는 의미를 화분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 난 식물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면 좋을지, 물의 양은 어느 정도로 맞춰야 하는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어서 초록빛 새싹이 돋기만을 바라며 그저 물만 흠뻑 흠뻑 넘치게 주었다. 오히려 물을 자주 주면 썩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하여 잠시 관심을 끊어도 봤지만 그래도 잎이 나오지 않자 금세 또다시 자꾸만 기웃거리는 눈치 없는 처방을 혼자 내리곤 자주 실망했다. 어떻게 해달라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식물은 말이 없고 나는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식물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무조건 많이 많이, 자주자주! 물이든 마음이든 쏟는 것이 관심과 애정의 척도로 여겼던 퍽 눈치도 없는 일방적인 사람이었다.
사람이건 식물이건 지켜보고 관리한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님을 느끼고 ‘아 역시 식물을 키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구나, (이번에도 역시) 나하곤 맞지 않는구나’하며 아무런 죄가 없는 식물(과 사람)에 원인 모를 예민함이라는 특징을 제멋대로 갖다 붙이며 조급한 판단을 일삼았다. 하지만 비단 식물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나는 어떻게 제대로 표현하고 마음을 주어야 하는지 늘 서툴고 어려웠던지라 식물에게까지 감정이입을 하고는 크게 원망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마음을 내려놓고 화분을 보면 거짓말처럼 새싹이 살짝 올라온 것 같기도 했고 그 작은 반응에 크게 기대하고 또다시 앞뒤 재지 않고 퍼붓다 속절없이 절망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바로 보여주지 않음에 성급한 욕심만 부리며 마음속에 미움을 키워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손 쓸 수 없이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조금 더 신경 써서 들여다 봐 줄 걸, 조금 더 세심히 보살피고 챙겨야 했는데’하며 후회와 후회를 거듭 반복했었다. 후회는 언제나 그렇듯 늘 늦기 마련이었고 몇 개의 화분을 더 보내고 나서야 기다림과 단념 그리고 그리고 성숙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들을 배웠다. 더 이상의 실수는 없을 거라고 늘 다짐하면서.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이제 나는 전보다 나름 성숙해졌고 그럭저럭 남들을 배려하며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하지만 무고한 희생으로 얻게 된 깨달음에도 여전히 나라는 작자는 자주 준비 없이 기다리고 자주 성급히 단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