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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학생 처음 봤어요"

아빠의 고등학생 자녀, 학급상담 후기

by ESSAM

고등학생이 된 아이의 2학기 첫 학급상담.


상담 몇 주전, 어느 날 저녁,

엄마는 전화와 대면 중

전화통화 방식을 선택할 거라고 말했다.

'엄마가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아빠는 훈수를 둔다고,

'그래도, 만나서 얘기하는 게 낫지 않겠어?'라고 말해버렸다.


예상하겠지만,

그다음 답변은...

'그럼, 아빠가 가면 어때?"

사실, 가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질 못했다.


더군다나, 9월 초 너무 바쁜 시기라서

선뜻, '그래 내가 간다.'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상담이 저녁시간이라

나는 엄마에게 '그럼, 시간 내 볼게'라며

상담방식을 바꾸자고 선언했다.


교사시절,

학교에서 오랫동안 학부모 상담을 했었지만,

내가 학부모가 되어 상담을 받는 입장이 되니,

다소 어색하기도 하고

다소 난감하기도 했다.

특히, 고등학생 자녀 상담이다 보니 말이다.


그런 심정을 알았는지,

엄마는 당일 아침, 아빠에게 카톡을 보내왔다.

"이런 질문들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넉넉히 도착하리라 생각하고

퇴근을 했지만, 금요일 도심 교통은 넉넉지 못했다.

다행히, 여러 맵 중 가장 지름길을 알려주는

맵의 경로를 따라 늦지 않게 도착했다.


상담 시간보다 15분 전쯤 도착,

화장실을 찾는다고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돌리니, 1학년 교실들이 눈에 들어왔다.

용무를 보고 나오며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을

아이의 교실을 기웃거렸다.


교실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고,

창 밖으로 아이와 눈이 마치치길 바라며

두어 번 기웃기웃.

아이도 아빠의 상담시간을 의식했을까?

다행히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와 반가운 만남도 잠시,

아이는 바로 들어가야 한다며

인증샷만 기록으로 남겼다.


상담 대기실에는

다른 반 학부모로 추정되는 엄마 3명이 앉아있었다.

다들 어색한지 핸드폰만 만지작.

나 역시, 카톡을 열어

엄마가 코치해 준 질문들을

다시 확인했다.

'절대 놓치면 안 된다는 심정으로'


상담시간 3분 전쯤,

담임선생님이 찾아왔다.

그도 나도,

서로를 처음 보는 사이이지만

누가 봐도, 그가 담임선생님이고,

내가 아이의 아빠인 줄 알았을 것이다.


담임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그의 자리로 갔고,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출산에 대한 축하인사(엄마의 코치)와 함께

상담은 훈훈하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담은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담임선생님의 브리핑이 있었다.

안내를 받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아이 엄마가 준 예상질문을

보기라도 한 듯

정확하게 해당 질문들에 대한

담임교사의 답변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학교생활을 너무 잘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도 별 탈없이 원만하게 지냅니다.


특히, 학급에서 맡은 1인 1 역할은 정말 놀랍습니다.

학급 이벤트 담당으로,

친구들의 생일을 챙겨주고,

크고 작은 이벤트를 추진하는 일인데요.

사실, 제 경험으로는

거의 대부분 아이들이

조금 하다가 말거든요.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워낙 이 학교 애들이 성적에 민감하고,

작은 일에도 예민한 편이기도 해서...


그런데, OO은 남녀학생들 가리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꾸준히 하더라고요.

제 교직 생활 중

이런 학생은 처음인 것 같아요.


OO 같은 학생들만 있으면

담임하기 참 편할 것 같습니다."


이후 이어질 성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

아이에 대한 칭찬을 먼저 깔아 놓은 건 아닐지 모르겠으나,


아빠 입장에서는

그 이후 이어진 성적이야기보다

성적에 들어가지 않는

학교 생활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담임선생님이 과장을 걷어내고,

얼마나 순도 높은 이야기를

아빠에게 들려줬는지 모르겠으나,

아이의 그런 성향에 대한 믿음은 있었기에

아이가 학교에서 배우고, 행동했으면 하는 일들을

잘하고 있구나 하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빠도 담임선생님에게 덧붙여 말했다.

"아이는 기획하는 일을 좋아해요.

그리고, 책임감이 강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해내려고 하는 성향이 있어요.

문제의식도 있는 편이라

학교던, 학급이던 그런 역할이 주어지면

책임감 있게 수행할 아이예요.


아이는 학교를 참 좋아해요.

담임선생님, 교과선생님들도 좋아하고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가기 싫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아이가 고등학교에서도

좋은 추억, 경험 많이 만들고

한층 성장하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멀찌감치 시계를 보니,

약속된 20분이 지나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별다른 신호를 주진 않았지만

나는 이쯤에서 상담을 마무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앞쪽에서 상담받는 학부모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옆쪽에서는 한창 성적향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의 집중력을 흐리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나보다 더 오랜 시간 담임선생님과 앉아있었다.


차를 운전하며

학교를 빠져나오는데

기분이 흐뭇해짐을 느꼈다.


현재의 입시체제에서

모든 초점이 '입시와 성적'에 맞춰져 있지만

(담임선생님도 그 부분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는 아이가

이 시기, 이 공간에서만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을

그나마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그런 경험과 배움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경험이 훗날 점수 1, 2점보다

중요할 거라는 자신감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아이를 더욱 믿고

사랑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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